악화된 사춘기
내 우울증은 햇수로 거의 10년이 넘었다.지금은 만성이 되어
어느 정도는 일상생활도 하고, 웃기도 하고, 슬픔도 느끼며 산다.
완전히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숨은 쉬고 있다.
어떤 순간을 ‘악화의 시작’이라고 불러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좋았던 날보다 힘들었던 날이 더 많았고, 악화의 순간은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보려 한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은 이혼하셨다. - 그 당시는 이혼이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허름한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종교에 몸담고 계셨고, 동생과 나는 그 단칸방에서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내 중학교 시절이 악화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0년대 중후반, 학기 초마다 ‘가정조사’라는 이름의 설문이 있었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질문들.
집에 냉장고가 있는지, TV는 있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왜 그런 것들이 궁금했을까.
빈칸을 채워야 했지만, 내겐 쓸 단어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학기 초가 되면 나는 종종 교무실로 불려갔다. - 사실여부가 궁금했으려나.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의 배려가 부족했거나 혹은 너무 과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을지 몰라도, 그 시선은 내게 또 다른 낙인이었다. 가만히 두는 것이 배려라고 믿었던 순간들도, 괜히 더 들여다보던 순간들도 결국은 내 사춘기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학교도 싫었고, 단칸방도 싫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도 싫었고, 하소연할 곳 하나 없던 열다섯 살의 내 인생이 참으로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부터는 며칠 내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세상에서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을 알고 있던 선생님들은 나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구두를 신고 언덕을 올라, 계단을 올라, 단칸방 문 앞까지 찾아오셨다. 등교를 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학교가 가기 싫어요.”
“아무도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이런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 어떤 문장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남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냥요.”
그냥.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시절.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나를 모른 척하지 않기를 바랐던 모순된 마음.
누군가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 묻는다면, 나는 아마 고개를 저을 것이다. 설령 상황이 달라진다 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 하나로 버티던 공간. 처절함으로 점철된 그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악화의 시작’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