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시작

완치라는 착각.

by 딥페이지

정신과 약은 나에게 꽤 큰 힘이 되었다.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약이 맞지 않아 13~14시간을 내리 자기도 했고,

어지럼증이 하루를 통째로 집어삼킨 날들도 적지 않았다. 몸이 적응하지 못한 채 휘청거리던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라는 치료 기간 동안 약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는 하나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덜해졌다는 것.


이 문장을 쓰면서도 조금 어색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 생각이 너무 오랫동안 ‘기본값’처럼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들은 평소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디폴트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때의 나는 거의 8년 가까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약을 먹고 나서 느낀 변화는 단순한 기분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처럼 돌아오는 느낌’에 가까웠다.

물론 완벽하게 일상을 회복한 건 아니었다.


매일 씻지도 못했고, 청소도, 밥도 규칙적으로 하지 못했다.
무기력이라는 녀석이 여전히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달라졌다.
사람이 덜 무서워졌고, 덜 무서워지니까 농담이라는 걸 하게 됐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다 나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흔히 찾아오는 시기가 있다.
“이제 나 다 나은 것 같은데?”
“약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나 역시 그 시기를 지나갔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좋지 않았다.

단약을 하고 4~5개월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건 내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단약은 반드시 의사와 상담 후에 하세요.


지금 돌이켜보면, 약을 끊는다는 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내 상태를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지금의 나는 안다.
약은 함부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끊고 싶어도 쉽게 끊을 수 없다.


우울증은 만성으로 접어들었고,
괜히 단약을 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조차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열심히 병원을 다니고,
가능한 선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버텼냐는 말을 이제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행운일지도.


아직 증상은 남아 있다.
공황은 불쑥 찾아오고, 우울은 예고 없이 고개를 들고, 재경험은 여전히 나를 붙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너져 있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


나는 지금,
악화와 회복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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