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500일, 나를 버티게 하는 힘

그땐 맞았지만 지금은 아닌 말씀

by 이앙꼬

“술이 내 인생을 망쳤다.” 신약성경 18쪽 상단에 떡하니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예수께서 ‘그분이 맞느냐“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하시는 장면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메모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거칠게 흘려 쓴 데다가 그 내용도 상당히 도발적이어서 그것을 쓴 당시의 심리상태를 미루어 짐작케 합니다. 원망과 불만과 분노 따위가 흥건합니다.


물론 제가 쓴 게 맞습니다. 재작년 10월경, 암 확진을 받은 직후일 것입니다. 저처럼 암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대게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달랐습니다. 암 통보 직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엄마는 어쩌지?’였습니다. 남편 먼저 보내고 아들 하나를 가슴에 묻은 분입니다. 세상천지에 그 어머니와 나, 둘 뿐입니다.


가슴을 여는 큰 수술을 받은 끝이어선지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온 관절이 성치 않으며 시력마저 않이 나빠지셨습니다. 작은 외부 충격에도 곧잘 섬망증세까지 보이시곤 하십니다. 저는 그 병약한 팔순노모의 실질적이고도 유일한 보호자입니다. 나마저 먼저 떠나면 남은 어머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을 터입니다. 요양시설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의료기술이 발전했다해도 암은 여전히 죽음과 병치됩니다. 저는 암이란 소릴 듣고는 바로 죽음을 떠올렸고 어머니와의 이별을 예감했습니다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당신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초기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협상단계로 들어간 이유입니다. 메모는 아마 그즈음에 썼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술부터 끊었습니다.부질없는 노릇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습니다.

술 말고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열 몇 살 때부터 그동안 어지간히도 마셔댔습니다. 특히 그 앞의 10여 년은 말 그대로 중독자처럼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놔두었다면 저는 아마 더 일찍 사달이 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술, 당신의 보호자로서의 지위가 그 참혹한 늪에서 나를 일시적으로나마 끄집어내 준 셈입니다.


어느 날 별 다른 설명도 없이 갑작스레 금주를 선언하더니 정말 단 한 방을의 알코올도 입에 대지 않는 저를 보고 한 후배는'진짜 독한 인간'이라 했습니다.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죽어야 끊는다는 담배에 술까지 단칼에 그랬으니 그래 보일만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물러 터진 인간입니다. 유혹에 특히 취약합니다. 그래서그런 제가 저부터 빋기지 않습니다.


후배는 내처 그 비결을 묻습니다. “행여 미덥지 않으시거든 제 병을 깨끗이 다 낫게 하지 마시고 무엇이라도 남겨 두시어 또다시 교만해지고 게을러지고 못된 마음을 품을 때마다 다시 아프게 하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회심의 사도 바오로는 그걸 몸 안의 가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제가 그리 되고서야 그 말씀의 참 의미를 알았습니다.


앓던 병이 다 나으면 그게 다 제 덕인 줄 아는 게 인간입니다. 바오로의 기도는 그러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 아플지언정 교만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제 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책임감 혹은 소명의식일 수도 있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 둘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은 사랑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가장 강렬하고 애틋한 인간 감정의 정수,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을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그를 위해 기꺼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의지의 표현이 사랑의 실체이자 힘입니다. 사람을 죽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모든 유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까지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힘이 셉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그래서 아프지 않았다면 미처 그걸 모르는 채 생을 마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걸 지금은 압니다. 그러니 술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건 순전히 억지입니다. 술이 그런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일깨워 주기 위해 맞물려 돌아갑니다. 저를 망치는 건 그 숱한 징조와 계시를 보지 못하는 제 자신입니다. 모든 게 내 탓입니다. 금주 500일,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작가의 이전글그 눈빛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