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야 할 인간유형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지 3년쯤 됐습니다. 가끔 문자 따위로 근황 정도만 주고받았습니다. 그도, 저도 꽤 심각하게 아팠습니다. 다행히 둘 다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함께 살아 있음에 감사드렸습니다. 아프지 말자고 다짐부터 했습니다. 우린 그동안 그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인사치레가 끝나자 친구는 새로운 사업계획서를 펼쳐 보입니다. ‘우리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라며 자신만만한 눈치입니다. 친구는 가감 없는 평가를 부탁합니다. 찬찬히 보고서를 넘겨 봅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봐도 아이템은 시의적절하고, 아이디어는 참신합니다. 실현 가능성을 포함한 기술적인 문제는 문외한인 제가 왈가왈부할 대목이 아니었습니다.
친구가 특별히 부탁한 게 있는지라 저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드는 몇 가지 의문과 내용 전개상 보충 설명이 필요한 대목 등을 지적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데, 친구의 안색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가, 싶어 얼른 톤을 바꾸려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그냥 서둘러 말을 마칩니다.
그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습니다. 원래 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친구입니다.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표정이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차 싶으면서도 '그 정도쯤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조금 심각해 보였습니다. 그 표정 ‘그래 잘 들었다’더니 그대로 일서서는 곧바로 가버립니다.
걱정된 마음에 다시 붙들고 변명이라도 할까 하다 이내 포기합니다. 지금은 저래도 저 혼자 다시 되새겨 보면 제 말이 그리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친구도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 마음먹고 오지 않았을까도 싶었습니다. 시작하면서 정말 솔직히 말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건 그였습니다. 게다가 우리 우정이 벌써 몇 년인데.
두어 시간쯤 뒤에 그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습니다. 다소 민망하고 조금 유치하다 싶은 내용이라 전문을 공개하긴 그렇지만 핵심은 그거였습니다. ‘이제 이런 걸로 볼 일 없을 거다.‘ 그러니까 일종의 결별 선언이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상했다는 표현일 터입니다. 이렇게까지 반응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충격이 컸습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께서는 “솔직한 훈계가 숨은 사랑보다 낫다(잠언 27.5)”하셨습니다.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은 바로 잡게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일 터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매는 신실하고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은 헤프다(잠언 27.6)”고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일수록 쓴소리를 마다하지 말고 그의 앞에서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오히려 경계하라는 가르침 같습니다.
저는 그 가르침에 충실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를 아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을 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그만 또 오버한 모양입니다. 정성들여 준비한 걸 가까운 누군가에게 보일 땐 모두 인정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입니다. 그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렇게 잘 알면서 저는 또 사고를 친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그런 보도자료를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나이 들며 가장 먼저 손절(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관계를 끊는 것)해야 할 인간 유형 베스트 5‘였습니다. 시기하는 인간, 제 자랑만 하는 인간, 유혹하는 인간,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 그리고 으뜸이 지적(질)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걸 보곤 뜨끔했습니다. 제 모습이 다 들어 있어서였습니다.
그게 며칠이나 됐다고,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런 못된 성격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데 40년 넘은 친구마저 잃게 생겼습니다. 이럴 땐 당연히 제가 먼저 전화해야겠지요. 하지만 전화기가 쉬 쥐어지지 않습니다. 이럴 땐 또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합니다. 대책도 없고 가망도 안 보이는 이 못돼 먹은 성격,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