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축일에 부쳐
주님 부활 대축일 주간입니다. 목요일(4월2일)부터 파스카 성삼일 전례가 시작됩니다. 첫날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하신 마지막 만찬을, 다음 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립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큰 사건들입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틀 간 전례를 모두 빼먹었습니다. 바쁘다는 건 그저 핑계입니다. 순전히 게을러 그랬습니다.
4월 4일 토요일 저녁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는 봉헌했습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라고도 합니다. 파스카(Pascha)는 그 자체로 ’부활‘이라는 의미, ’거르고 넘어가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정신철 인천교구장님께서는 이번 주 주보를 통해 예수님 부활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기쁨으로 넘어가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 깊은 의미를 담은 전례답게 의식은 여느 때보다 장엄하고 거룩하며, 가장 화려하게 지냅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지루하거나 한가할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문을 치우며 밖으로 나오시는 그 모습을 상상하면 여느 영화 못지않게 긴박했고 스펙터클하기까지 합니다.
미사가 정점을 행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지금쯤 예수님께선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제 부활하셨으니 환히 웃고 계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며시 눈을 뜨고 제단 중앙의 십자고상을 올려다봅니다. 당신의 바뀐 모습을 기대했지만 제 눈에 든 예수님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의 여윈 몸을 하시고 창백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생뚱맞게 배고프신가 보다, 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몇 날을 굶으신 게 틀림없었습니다.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에겐 당신의 살과 피까지 먹이셨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는 납작하다 못해 오목하게 꺼져있습니다. 우리 본당 십자고상이 유난히 사실적이긴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가만히 봅니다. 잔뜩 일그러졌습니다. 눈꼬리를 한껏 내려뜨리시고 두 눈을 질끈 감으셨습니다. 입도 굳게 닫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고통에 지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저 육신의 아픔뿐 아니라 뭔가 아쉽고 안타깝고 가슴이 아린 듯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그런 표정입니다.
멀쩐한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고 창끝이 생살을 찢고 뼈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처절한 고통의 한가운데, 이미 인간의 한계는 넘어선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지으시는 저 표정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시라도 당장 죽어가는 당신보다 남겨진 우리들이 더 불쌍하고 가련해서는 아닐까요. 너희가 가여워 어쩌면 좋으냐는, 그런 의미일까요.
순간 울컥해집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집니다. 부활의 날에, 가장 거룩하고 기쁜 환희의 순간에 저는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겨워졌습니다. 눈물은 쉬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든 걸 내주시고 베푸시는 예수님의 그 깊은 속을 비로소 느꼈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욕망을 꽉 쥔 채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는 제 모습이 미워져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명의 마리아 앞에 처음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불과 3일전 가장 참혹한 고통과 함께 목숨을 잃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평온하냐(마태 28. 9. 참조)?”였습니다. 제 몸 앞신 것보다 남겨진 우리를 더 걱정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평화롭길 바라셨고 다시 살아나서도 그게 제일 궁금하셨습니다.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잡은 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 하시고는 그것을 맛나게 구워 빵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 참조).” 예수님은 아무것도 드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런 분이십니다. 당신이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거룩한 날, 숭고한 사랑의 세례를 받습니다. 눈물은 아직도 그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