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위령의 달을 맞아
10월의 마지막 날, 엘리베이터 앞. 한 아이가 내 옆에 와 선다. 차림이 요상하다. 트레이닝 복에 찌그러진 갓을 썼다. 픞라스틱으로 염주처럼 만든 치렁한 목걸이도 두르고 있다. 아이가 혼자이길래 물어봤다. “연극했니?” “아뇨 핼로윈 파티요.” “그렇구나, 넌 캐릭터가 뭐니?” “저승사자요” 그러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아이가 너무 착하고 순해 보여 그렇지.
다음날 미사에서 신부님은 11월 한 달은 위령의 달이며 특별히 1일은 모든 성인의 날, 2일은 위령의 날이라고 알려 주신다. 천국에 계시는 모든 성인을 비롯해 돌아가신 조상들의 넋을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는 기간이다. 정체를 몰랐던 할로윈 데이도,그 유명한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 축제도 여기에서 기원한 풍습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모두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다. 생물학적 죽음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활동능력의 정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이 생명을 잃고 죽고 나면 남은 자들은 시신을 땅에 묻거나, 화장해 뿌린다. 하느님 말씀처럼 인간이 흙에서 나온 것처럼 다시 흙으로 돌아가(창세 3.19 참조)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 이후를 전혀 알 수 없다. 체험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죽은 자들의 세상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겐 영혼이란 것이 있으며 육신이 죽은 후에라도 그것은 살아 사후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한 이들의 천국과 죄지은 자들의 지옥은 여느 종교나 문화, 민족 등을 막론해 존재한다. 죽은 조상들께 예를 다해 추모하는 관습은 그런 관념으로부터 기원한다.
가톨릭에서는 특별히 그 중간에 연옥을 따로 두었다. 죄를 지었으되 지옥에 갈 만큼은 아니어서 일정 기간 정화가 필요한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다. 죽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산 후손들이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를 위해 가톨릭은 전대사의 양도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죽은 자들의 날 축제는 그 연옥의 개념을 전통충습에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가톨릭에 들기 전부터 죽은 이들에 대한 그런 생각이 강했다. 30년쯤 전 사촌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이후부터였다. 한창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녀가 참 안타깝고 비통했다. 그런데 상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가족 중 객사하신 분 계시죠?” 물었다. 그들은 사이비 포교꾼들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가진 돈 모두를 ‘촛값’으로 주었다. 그 이후에도 속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잘해야 한다고 믿으며 부처님께 절을 올리곤 했다. 그래서 나쁠 건 없잖은가. 그렇다고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그저 당신들 편하기를, 죽어서라도 이승의 안 좋은 기억들일랑은 잊고 지내시기를 기원했다. 그 동생처럼 모든 이의 죽음은 누구에게라도 회한으로 남을 터이니.
아우구스티노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실제가 그렇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칠 현실이며 아무도 그걸 피해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도 죽음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고 있는 셈이다. 그게 언제 올진 아무도 모른다. 우린 단지 그걸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살 뿐이다. 죽음과 삶은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있는 것만큼 가깝다.
암은 완치가 없다. 그 부위를 잘라내도, 그 독한 약과 방사선을 쏘여도 암세포는 잘 죽지 않고, 그런 것 같다가도 어느 틈엔가 다시 살아나곤 한다. 첨단의 21세기에도 암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며 곧잘 죽음과 병치하는 이유다. 그러니 나와 같은 암 환자들은 다른 이보다 한층 더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그것에 대비해야 할 처지다.
내가 죽고나면 나를 기억해 줄 사람도, 최소한의 애도를 표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렵거나 지레 걱정하진 않는다. 그렇게 되면 또 그런대로 주님께서 달리 인도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부터라도 내 죽음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건 안다. 지금 누리는 이 시간이야말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은총과 자비의 선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