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
교리공부를 막 시작할 때였습니다. 첫 수업이 끝날 무렵 저는 참다 참다 기어이 그 질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믿음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즈음 저의 심각한 화두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시며 "네? 그, 그야 믿음 아닐까요. 아, 아니다. 사랑인가” 하셨습니다. 기습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에 적이 당황하셨는지 말까지 더듬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첫 대답은 ‘믿음’이었습니다. 부지불식 간에 입 밖에 내는 말이 진심일 터, 사랑이라고 금방 정정하셨지만 내심으로는 믿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대답도 그거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그를 믿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러니 저로서는 소기의 목작을 달성한 셈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선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사랑'의 힘과 위대함을 찬양하십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고, 예언도 신령한 언어도 지식도 필요 없어지게 하며. 심지어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다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 으뜸은 사랑이라고 단언하십니다(코린1 13. 13 참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 사랑은 그저 불꽃처럼 한순간 타올랐다 사라지는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일종의 기초, 사랑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좁은 경험으로 빚어진 편견일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렇게 믿으며 그걸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젊은 커플의 혼인성배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주일미사 직후 성전에서 거행됐는지라 자연스레 하객이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광경이고 평소 궁금하기도 했어서 끝까지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신의'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의는 믿음의 한자어 표현, 그게 종종 사랑보다 앞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한다는 혼인서약이나 ”주님께서는 두 분이 한평생 ‘신의’를 지키며 모든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신부님 훈시가 그랬습니다.
이는 적어도 결혼에 있어서는 '사랑'보다 '신의'가 먼저임을, 오히려 그의 비중이 더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으뜸이라는 바오로 사제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흔한 확증편향의 한 증세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하지만 그냥 그렇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대목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릴 사랑하십니다.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사랑을 주십니다. 당신은 우리가 툭하면 삐치고 화내며 아무렇지 않게 등을 보일 것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그런 우릴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무한합니다. 그 자체로 사랑이십니다. 우린 그런 그를 그저 믿으면 됩니다."
어떤 사랑이냐, 누가 누굴 사랑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하느님의 사랑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당신은 우릴 그저 사랑하시고 우린 또 그 사랑을 그냥 믿으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안 그러려 해도 그 관계에는 계산이 들어갑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 점점 더 커지면서 사랑도 더 깊고 단단해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아무로부터의 신뢰도 얻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믿지 않았기에 저는 이 나이까지 혼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한 분만은 그런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이제 더 바라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끝내 실패한 인생을 살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