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혁신 DNA, ‘친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향하다
애플이 21일(현지시간) 공개한 4인치 화면의 ‘아이폰 SE’를 두고 ‘혁신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이폰 SE는 보급형 스마트폰이다. 애초 보급형에서 혁신을 찾고자 한다면 무리가 아닐까. 물론 보급형 스마트폰에서도 혁신은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렸을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샤오미가 인기를 얻었으니까.
아이폰 SE는 외형과 크기가 2013년 나온 아이폰5s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성능은 지난해 9월 출시된 ‘아이폰6s’ 수준이다. 가격도 64GB 모델이 499달러(57만 8000원)로 ‘아이폰6s’ 64GB 모델(749달러) 보다 150달러 싸다.
작아진 화면을 반영한 가격일 수 있으나 어찌 됐든 아이폰 SE는 혁신을 담아낸다는 의도보다 작은 화면에 최신 사양을 갖춘 모델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애플의 봄철 신제품 발표회에서 굳이 ‘혁신 DNA’를 찾아야 직성이 풀린다면 중고 아이폰을 자동으로 분해해 재활용이 가능한 부품을 추출하는 로봇 ‘리암’(Liam)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애플의 비밀병기 ‘리암’
리암은 21일 아이폰 SE와 함께 공식 소개됐지만 미국의 정보기술 전문매체 매셔블은 며칠 앞서 특별히 리암을 독점적으로 살펴보고 거기에 애플의 ‘특급 비밀’(super-secret)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실제 리암을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애플 내에서도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애플이 매셔블에 밝힌 바에 따르면 리암을 만들기까지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애플은 리암이 그 이전에 결코 시도되지도, 볼 수도 없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부분의 산업용 로봇이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부품을 조립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리암은 재활용이 가능한 상태로 부품을 분해한다. 매셔블의 사만다 머피 켈리 기자는 애플이 리암을 만든 철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애플이 애초에 아이폰을 조립했는데 이론상 제조사보다 더 잘 그걸 분해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리암을 만나기 위해 먼저 애플의 서비스센터에 접수된 침수 아이폰의 운명을 생각해보자. 이들 아이폰 중에는 사실 말이 침수지 물을 내리지 않은 화장실 변기에 빠진 ‘대참사’를 겪은 것도 상당수일 것이다. 물과 암모니아, 그 밖의 말로 할 수 없는 이물질들로 오염된 아이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미국을 예로 들면 이렇게 버려진 아이폰들은 미국 내 두 곳의 분배 센터로 옮겨져 수작업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부분들만 추려진 뒤 리암이 있는 애플의 비밀 창고로 옮겨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비밀 창고에는 리암의 로봇 팔이 가득 들어차 있다. 리암은 휴머노이드 형태의 로봇이 아니다. 외형은 자동화된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리암은 먼지 유입을 막고 분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 물질의 유출을 막기 위해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 리암의 로봇 팔은 회수된 중고 아이폰을 부품별로 매우 정밀하게 분해한다.
유심칩이 담긴 작은 트레이부터 나사, 배터리, 카메라 등 재활용하기 쉽도록 이런 부품들을 제각각 따로 분류해낸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재활용 방식은 그저 스마트폰이든 컴퓨터든 모두 분쇄기에 넣고 간 뒤 자석을 이용해 금속류만 분류하는 것이었다.
리암이 분류해낸 니켈과 알루미늄, 구리, 코발트, 텅스텐과 같은 금속들은 재활용 업자들에게 팔린다. 텅스텐은 그 확보를 놓고 무력 분쟁이 일어날 정도의 희소광물이다.
애플에 따르면 리암은 11초마다 한 대씩 아이폰을 분해하고 여기서 각각의 부품을 성공적으로 분해하는 확률은 97% 정도다. 현재 리암으로 연간 분해 가능한 아이폰은 120만대다.
애플은 리암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여기에 특화된 공학자들을 고용했고, 또 다른 애플 팀이 제품 분해를 위한 프로그래밍 코드를 만들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리암이 실제 현장에 투입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애플은 리암이 여전히 연구·개발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애플은 현재 유럽 등 더 많은 지역에 리암을 설치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리암은 아직 아이폰6s만 분해할 수 있는데 애플은 장차 다른 애플 기종도 분해할 수 있도록 개발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제품 개발에서도 부품의 분해가 더 쉽도록 만들 계획이다.
■애플의 혁신 DNA, ‘친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향하다
리암을 만들면서 애플은 소비가전산업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바로 쓰레기다.
싼 인건비 때문에 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되는 개발도상국에서 가전 쓰레기, 특히 폐기된 배터리는 주요한 환경 오염원의 하나다. 가전 쓰레기는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고, 분해 과정에서 유독성 물질이 배출된다.
가전 쓰레기 재활용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뭔가 해야 한다’(DoSomething.org)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전 쓰레기가 전체 쓰레기 매립지에서 차지하는 양은 2%에 불과하지만 유독 물질의 70%가 여기서 나온다.
정부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친환경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커지면서 이 부분에서 기업의 사회적 공헌과 책임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환경 단체들은 다른 기술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애플에게도 환경 보전과 개도국 제조 공장에서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강하게 요구했다.
특히 2004년 그린피스가 애플이 유독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몇 년 뒤 ‘그린 마이 애플’ 운동으로 압박하자 스티브 잡스는 결국 2008년까지 브롬화난연제(BFRs)나 폴리염화비닐(PVC)와 같은 유독 물질을 제조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잡스는 이때 애플을 환경 친화적인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이런 점에서 리암은 환경 단체들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이자 잡스 이후 친환경, 지속가능 기업으로 변하기 위해 애플이 펼쳐온 노력의 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애플은 지속가능성을 기업의 주요 목표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의 의지도 강하다. 그는 2014년 애플의 ‘그린 이니셔티브’로 수익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투자자들 앞에서 “만약 여러분이 제가 오직 ROI(투자 수익률)에 따라서만 행동하길 원한다면, 애플 주식에서 발을 빼야 할 것이다”고 강경한 어조로 응수한 바 있다.
현재 미국의 모든 애플 관련 시설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다. 애플이 진출한 23개국 전체로 따지면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87% 정도다. 2017년 완공될 애플의 새 본사인 ‘애플 캠퍼스 2’에는 친환경 자재들을 대폭 사용했고 본관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을 덮었다.
애플은 또한 아이폰 교환 정책도 ‘리뉴(Renew)’로 불리는 새 정책으로 통합할 계획이다. 애플 제품을 구매한 이들이 새 제품을 사도록 유도하기 위해 선물 카드나 현금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재생’의 개념에 방점을 둔 새로운 교환 정책이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매셔블은 애플이 리암을 공개한 한 이유로 다른 기업들도 이런 방식의 제품 재활용에 적극 나서도록 유도하려는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한편 월요일 언론 공개 행사를 시작하면서 팀 쿡은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아이폰 보안 기능 해제 여부를 놓고 벌이는 법적 다툼에 관해 언급하면서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애플 기기의 수가 최근 10억대를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며 “이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말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한 기업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플의 봄철 신상품 발표회장이 기술적인 의미의 ‘혁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적어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고,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 벌이는 애플의 또 다른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