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마디 말보다 퍼포먼스가 낫다
“레이디 가가는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 동안 정치적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가디언) “레이디 가가는 슈퍼볼 공연에서 정치를 피해갔다.”(더 힐·폭스뉴스)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슈퍼볼’(Super Bowl) 하프타임 공연에서 역대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다. 줄을 매단 채 경기장 옥상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과 레이디 가가의 머리 위에서 별처럼 빛나던 드론의 군무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공연이 끝나자 팬들은 물론 유력 언론들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했다. 레이디 가가가 미 대선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터라 하프타임 공연에서도 트럼프를 비판하는 발언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경기장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국기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구절인 “하느님 아래 하나의 나라, 모두를 위한 불가분의 자유와 정의”라고 말한 것이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다. 레이디 가가의 공연 선곡에도 숨겨진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개성과 LGBTQ(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퀴어)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Born This Way’가 대표적이다. 이 곡에는 “게이이거나 이성애자 거나, 바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인 것은 상관없다. 나는 올바른 길에 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태어났다”는 가사가 담겨있다.
레이디 가가의 트럼프 비판은 생각보다 더 급진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포스트(WP)는 6일 “레이디 가가의 하프타임 공연이 비정치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This Land is Your Land’(이 땅은 너의 땅)의 의미를 생각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Born This Way’가 이날 레이디 가가의 유일한 ‘체제전복적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주장했다.
레이디 가가는 이날 ‘God Bless America’(하느님이 미국을 축복하길)로 공연을 시작했으나 지난 트럼프 취임식 다음날 있었던 ‘여성의 행진’ 참가자들이 불렀던 ‘This Land is Your Land’로 자연스럽게 곡을 바꿨다. ‘This Land is Your Land’는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이자 노동 운동가인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1912~1967)가 작곡한 노래이다. 우디 거스리는 1930년대 텍사스부터 로스앤젤레스까지 대공황으로 황폐해진 미국 서부 전역을 돌며 그가 보고 겪은 가난과 차별의 현실을 노래에 담았던 인물이다. 1940년대 거스리는 라디오에서 케이트 스미스(Kate Smith)가 부른 ‘God Bless America’를 듣는 데 질려버렸다. 그는 어빙 벌린(Irving Berlin)이 작곡한 이 노래가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간과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컨트리 그룹 카터 패밀리(Carter Family)의 곡 ‘When the World’s on Fire’를 편곡하고 가사를 바꿔 ‘This land is your land’를 만들었다.
레이디 가가는 ‘This land is your land’ 중 일부인 “이 땅은 너의 땅, 이 땅은 나의 땅, 이 땅은 당신과 나를 위한 땅”이라는 가사를 노래했다. 1944년 녹음된 이 곡의 네 번째 소절(음반 발매 당시에는 빠졌다)에는 트럼프가 행정명령으로 모슬렘 7개국의 일시적 입국을 금지하고, 멕시코 장벽 건설을 지시한 지금의 현실을 예언하는 듯한 가사가 담겨있다. 네 번째 소절은 이렇다. “거기 나를 멈추려고 하는 크고 높은 장벽이 있다. / 거기에는 ‘사유지’라는 글이 쓰여있다. / 하지만 그 안쪽에는 어떤 말도 붙어 있지 않았다. / 이 땅은 당신과 나를 위해 마련됐다.” 이 가사는 미국이 모두를 위한 나라라고 내세우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당신들만을 위한 땅이 아니라 너와 나 모두를 위한 땅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현실에 비춰보면 백인들만의 땅이 아니라 미국을 찾아온 모두를 위한 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곡 당시의 악보에는 적혀있지만 1944년 녹음본에는 빠져있는 여섯 번째 소절은 더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밝고 맑은 어느 아침, 구호소 옆 첨탑의 그늘에서 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이 굶주린 채 서있을 때 나는 신이 나를 위해 미국에 축복을 내린 것인지 의심한 채 서 있었다.” 축복받았다는 미국이지만 나에게 돌아온 축복은 없다는 의미로 미국의 불평등을 고발한 것이다. 미국의 음악비평가 로버트 산텔리는 이 곡을 다룬 비평글에서 “네 번째, 여섯 번째 소절에 있는 가사들이 종종 누락되거나 무시되면서 이 곡이 미국을 찬미하는 다른 애국적 가요들과 동급으로 여겨지게 됐다”라고 밝혔다. 거스리의 딸은 가사들이 누락된 원인을 정확히 모르지만 1950년대 초반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맥카시가 주도하던 반공주의 사회 운동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이날 공연에서 관중들 사이를 행진하며 ‘Million Reasons’의 마지막 소절을 부르던 중 한 흑인 여성을 가볍게 안아주며 원 가사에 없던 “why don’t you stay”(머물러 주세요)라는 가사를 덧붙였다. 워싱턴포스트는 레이디 가가가 미국의 통합을 바라며 우파를 위해 ‘God Bless America’를 부르고, 좌파를 위해 ‘This land is your land’를 불렀을 가능성도 열어뒀다.
지난해 초 타임지는 거스리가 약 50년 전 당시 집주인이던 도널드 트럼프의 아버지 프레드 C. 트럼프를 비판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거스리는 이때 미발표 가사에서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흑인들이 입주하지 못하도록 한 아버지 트럼프의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천국 같아 보이는 비치 헤이븐 흑인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 노, 노, 노! 올드 맨 트럼프! 올드 비치 헤이븐은 나의 집이 아니라네.” 도널드 트럼프 역시 선거 운동 기간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았던 인물이다. 레이디 가가가 이런 점까지 선곡에서 고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