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 주자 엠마누엘 마크롱이 러시아 가짜 뉴스의 공격 대상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위해 미국 대선에 개입한 러시아가 이번에는 목표물을 프랑스 대선으로 돌렸다. 미국 대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유리한 극우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매체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6일(현지시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 엠마누엘 마크롱 후보가 스푸트니크(Sputnik)와 러시아 투데이(RT)와 같은 러시아의 선전 매체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한 마크롱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사임해 신생 정당 ‘전진(En marche)’를 이끌고 있다. 마크롱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이민자 수용과 유럽 통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영자 매체인 스푸트니크는 지난 4일 “전 프랑스 경제장관 마크롱은 월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스푸트니크가 이 기사에서 인용한 취재원은 친 러시아, 친 아사드 성향인 프랑스 공화당 의원 니콜라 뒤이크이다. 뒤이크는 “(엠마누엘 마크롱은) 그의 경력을 통틀어 미국 은행 시스템의 대리인처럼 활동했다”라며 “대선에서 패할 경우 정치 경력을 계속 이어갈 의사가 없기 때문에 개인적 야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뒤이크는 “그의 개혁 조치들을 분석하면 우린 쉽게 그가 세계화와 시장 개방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며 “그는 공개적으로 자유시장 주의를 지지하고 있고 게다가 경제 장관으로 있으면서 프랑스 대기업들을 미국에 파는 걸 쉽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앵커인 드미트리 키셀로프는 지난 5일 방송에서 “마크롱이 고등학교 시절 만난 24살 연상의 프랑스어 교사와 결혼했다”라며 “그러나 여전히 그가 비전통적 (성적) 지향을 갖고 있으며 그의 선거 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12만 유로의 예산을 유용했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제기한 의혹에 어떤 근거도 대지 않았다. 뒤이크도 마크롱의 ‘게이설’을 제기했다. 그의 배후에 매우 부유한 게이 로비가 있다는 식이다.
러시아 매체는 대체로 프랑스 대선을 진흙탕 싸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 공화당 대선 후보 프랑수아 피용은 부인(페넬로페 피용)과 아이들을 보좌관 등으로 위장 고용해 약 90만 유로(약 11억 원)의 기금을 유용한 혐의로 후보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또 다른 유력 대선 주자인 극우정당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 당수는 30만 유로의 유럽의회 기금을 불법적으로 자신들의 보좌관들에게 지출한 혐의로 돈을 반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두 후보는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이날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진짜 목표물은 두 우파 정당 후보가 아니라 마크롱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피용이 ‘페넬로페 게이트’로 지지율이 급락한 사이 마크롱이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며 1위로 올라서자 러시아 관영 매체가 온갖 잡동사니 같은 매체들과 거짓 정보를 이용해 마크롱을 공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미 대선 기간 동안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해 그에게 치명타를 안긴 폭로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도 가세했다. 어산지는 최근 러시아 매체인 이즈베스티아에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에 엠마누엘 마크롱에 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힐러리가 월가의 조종을 받고 있으며 힐러리와 연관된 마크롱도 월가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도식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관련 자료는 엠마뉴엘 마크롱의 저녁 만찬 초대장뿐이다. 2015년 8월 27일 자인 이 메일은 마뉘엘 발스 당시 프랑스 총리와 마크롱만이 아니라 스웨덴 금융장관, 네덜란드 부총리, 이탈리아 외교장관 등 유럽 각국의 장관급 인사들과의 만찬에 힐러리를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이즈베스티아는 어산지의 발언을 토대로 기사를 보내면서 “어산지가 불붙은 프랑스 대선에 기름을 부었다”는 제목을 붙였다. 역시 크렘린의 입김 하에 있다는 비판을 받는 러시아 투데이는 이즈베스티아의 이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러시아 매체가 확산시키는 방식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지난해 12월 러시아가 트럼프 당선을 위해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이메일 등을 해킹하고 이 과정에서 조작된 정보를 유포했다고 결론 내렸다. 어산지가 러시아와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어산지는 러시와의 연루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유럽의 현 질서가 뒤집히길 바라는 바람에서 러시아와 행보를 같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병합 이후 형성된 서방의 반 러시아 전선을 해체시키기 위한 여론전을 전개하고 있다. 유럽 통합에 회의적인 극우 정당들이 주된 포섭 대상이다. 러시아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 세계에 ‘대안적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명목으로 언론 매체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러시아 투데이는 최근 런던에 스튜디오를 개설했고 스푸트니크도 한국어를 포함한 30개국 언어로 운영되고 있다.
미 대선을 계기로 가짜 뉴스가 선거를 비롯한 정치 과정과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6일 구글과 페이스북을 비롯해 온라인 플랫폼 업체들은 가짜 뉴스나 근거가 취약한 뉴스 콘텐츠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소셜 미디어 검색 플랫폼을 개발하기로 했다. ‘크로스 체크’로 불리는 이 플랫폼에는 올해 4월~5월 대선을 앞두고 르 몽드, 렉스프레스, 프랑스 텔레비지옹, BFM TV 등 8곳의 프랑스 언론도 참여한다. 페이스북은 지난주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플랫폼 개발 작업을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9월 총선을 앞두고 러시아 출신 소녀가 이민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지면서 이민자에 관용적 정책을 펴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큰 타격을 받았다.
러시아 매체가 주도하는 가짜 뉴스에 유럽 각국은 경계 태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일 마이클 팰런 영국 국방장관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거짓말을 퍼뜨리고 해커들을 동원해 중요한 기반시설을 공격함으로써 서방을 약화하려 하고 있다”라고 스코틀랜드의 한 대학 강연에서 밝혔다. 그는 특히 러시아가 거짓 정보를 무기화해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로 보이는 상황을 창출했다고 지적했다. ‘포스트 트루스’는 영국 옥스퍼드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국제 단어로, 객관적 사실이나 진실, 이성으로 접근하기보다 주관적 감정에 호소해 여론 형성을 이끄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혹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우리는 러시아를 향한 이런 의혹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확신한다”라며 “일국의 장관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