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도망친 여자>
영화 언론사 '씨네리와인드'에 발행된 글입니다.
<도망친 여자>는 프레임에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많고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각각 짧은 이야기는 들을 수 있는 반면에 주인공 감희의 이야기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느긋하게 여러 공간에 들어가 머무르는 그의 행동은 전형적인 도망의 모습과 가깝지 않고 도망의 정황도 알 수 없다. 그 어떤 플래시백 장면도 등장하지 않고 그의 어떤 과거 사실 하나 드러나지 않는다. 여태껏 오 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 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그의 반복되는 말만이 허공을 부유하다 금방 사라질 뿐이다.
어정쩡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말의 사실적인 특성을 형상화
<도망친 여자>는 집 현관 앞, 부엌 식탁, 영화관 직원실 등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가만히 앉아서 혹은 서서 나누는 대화들로 러닝타임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감희는 세 명의 지인들을 각각 만난다. 영순의 집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수영의 집에서 식사한 후 영화관에서 우연히 우진을 만나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 삶의 단면들을 목격한다.
인물들의 대화 장면들은 어정쩡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말의 사실적인 특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감희도 영화 초반부에서 비슷한 소리를 하듯 굳이 괜한 소리, 하기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 말의 가벼움. 그리고 발화자가 선택한 말은 진실과 무관하다는 점. 지인들은 감희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낯선 관계일수록 더 쉽게 자신도 모르게 진실과 진심을 털어놔 버리기도 한다. 발화하는 주체가 감추는 것과 털어놓는 것이 불규칙하게 섞여 있고 그것들을 각각 분간하기 쉽지 않은 말의 복잡성까지 화면에 섬세하게 그려진다.
도망에 앞선 속박을 드러내는 방식
자주 등장하는 롱테이크 장면들은 인물들의 대화를 극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다소 인물들과 거리를 둔 채 혹은 인물을 가까이 담은 카메라가 두 인물들 사이에서 이동하며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끊지 않고 오랫동안 화면에 담아낸다. 다만 갑작스럽게 인물들을 줌 인 하는 장면들은 화면에서의 리얼리티를 순간 깨뜨려 관객을 당황시킬 수 있으나, 오프닝씬과 연결시켜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그 의도를 드러내는 연출로 읽어낼 수 있다.
오프닝씬에서는 닭장 안에 갇혀 있는 닭들의 모습을 밖에서 담고 있는 화면이 줌 아웃 되며 피사체에서 멀어진다. 이어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들의 모습을 줌 인 하는 연출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로, 닭장 밖 공간의 인간들을 들여다볼 때 그들도 역시 무언가에 속박된 채 마냥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닭장 안에서 밖을 쳐다보는 닭들과 집 안에서 창문을 쳐다보고 있는 인물들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남편과 그동안)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 “(남편이) 사랑하는 사이는 그런 거래.”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단 한두 마디의 말만 있을 뿐 감희를 속박하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은 채, 그는 지인들이 모두 각자 자신의 삶에서 어떤 것에 의해 얽매여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도망친 여자>는 도망과 함께 도망에 앞선 ‘속박’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나왔을 감희가 다른 사람들의 속박을 목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프레임에 CCTV 화면이 담기는 장면들에서 이중프레임을 통해 인물들의 괴로움이 담긴다. 그리고 CCTV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 집중하여 관찰하는 감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지인들은 모두 화면 안에서 특정 공간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감희의 도망은 자신과 다른 삶들의 관찰이 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젠더 시각이다. 영화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룸메이트와 살고 있는 이혼한 영순, 혼자 살고 있는 미혼인 수영, 기혼 여성인 우진 그리고 남편이 있는 감희까지 네 여성의 다양한 삶의 형태가 눈에 띈다. 남성이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남성은 화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여성 인물들이 말하는 이야기 안에 들어 있고,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채 화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속박하는 존재들 중 하나로 그려지고 있다.
<도망친 여자>는 아무것도 확정 짓지 않는다. 관객은 제목을 제외하고서는 감희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이미 도망쳐 나온 여자, 도망치고 있는 중인 여자, 도망칠 계획인 여자 등 세 방향으로 모두 해석이 가능하다. 감희의 지인들 또한 과거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현재의 모습일 수 있고, 현재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감희의 도망과 지인들의 속박이 한 화면에 엉겨붙듯이 도망과 속박은 인간 세상과 한 인간의 삶에 공존하고 있다. 인간 혹은 모든 생명체가 도망과 속박의 굴레에서 도통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도망친 여자>가 말하고 있다.
http://www.cine-rewind.com/3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