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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형 Oct 25. 2020

열망과 결여를 찾아내는 사람

틈입하는 편집자, 열두 번째 편지

수현,


무릇 편집자는 세상의 열망과 결여를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열망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의 허무에 대해 잘 모릅니다. 현대인의 삶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사사로운 욕망에만 부지런할 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무언가를 열망한다는 것 자체를 진즉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얻지 못할 것이므로, 그저 ‘존버’의 세상이니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우리의 웃음은 기쁨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통증 없는 슬픔만 전시할 뿐, 존재의 결여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우울하지만 애도하지는 않는 삶, 그래야만 세상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사해 보이는 건 SNS에서나 존재하는 우리의 또 다른 페르소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편집자는 때로 정색하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무사한지, 우리의 삶이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편집자는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하여 본질로 향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무지의 문제점은 다름 아니라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자가, 그러한 자기에게 만족하는 것이지요.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플라톤, 향연, 천병희 옮김, 숲, 2012) 자신의 결여를 직면하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제대로 욕망하지 못합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결여를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존재의 열망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를 기획하기에 앞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습속인가 본질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습속을 “습관이 된 풍속”이라고 정의합니다(한편 풍속은 “옛날부터 그 사회에 전해오는 생황 전반에 걸친 습관 따위”, “그 시대의 유행과 습관 따위”로 풀이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불만은 비단 ‘습속’이란 단어에 대한 풀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전이란 무언가에 대한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그 시대의 관습적 정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습속을 극복하고 끝내 본질을 해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표준국어대사전은 ‘남자구실’을 “주로 남자는 아기를 갖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과 관련된 남자로서의 구실”로, ‘여자구실’을 “주로 여자는 아기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과 관련된 여자로서의 구실”로, ‘연애’를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으로, ‘왈가닥'을 “남자처럼 덜렁거리며 수선스러운 여자”로, ‘작업’을 “남자가 여자를 꾀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페미니스트’를 “예전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설명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자체가 습속에 갇혀 본질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자신이 기획하고자 하는 주제가 습속을 강화하는 일환에서 모색되고 있는지, 습속을 거슬러 본질로 향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습속을 강화하는 데 복무하는 책의 시장성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흔히 성공과 처세를 다루는 책들이 그러한데, 인문서는 그것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둘째, 통념인가 통찰인가? 세상에는 무수한 통념들이 존재하되, 그것을 뚫어내는 통찰이 책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통계학 부문의 세계적 권위자 한스 로슬링(1975~2017)의 유작 팩트풀니스(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9)는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세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통념에 딴지를 겁니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세상의 참모습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라고 딴지를 걸며, 풍부한 데이터와 과학적 통계를 제시하며 강력한 통념을 하나씩 하나씩 교정하며,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길로 독자들을 설득해 나갑니다. 이 책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인데, 저자가 세계의 미래에 관한 긍정적 전망, 그 건강함이 놀랍습니다. 췌장암으로 죽음을 앞둔 저자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다 보면, 그는 통계학을 도구로 세상을 긍정해내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찰스 디킨스(1812~1870)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이은정 옮김, 팽귄클래식코리아, 2012)는 이렇게 시작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무엇이든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 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도시는 18세기 말의 런던과 파리입니다. 런던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 계습의 주도하에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는 반면, 파리는 고통받는 도시입니다. 권력은 부폐했고 민중은 가난에 짜들어 있습니다. ‘희망의 봄’과 ‘절망의 겨울’ 사이에서, ‘우리 앞에 있는 무언가’와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시대의 통념에 굴복할 것인가, 혁명을 통찰해낼 것인가). 가난한 민중들은 권력의 공포 정치와 무도한 폭력에 맞서 ‘그날’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798년 7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됩니다. 도시는 온통 분노와 통한의 피로 물듭니다. 혁명은 성공한 듯하나 피와 복수와 권력의 관성에 휩쓸려 혁명 자체를 파괴합니다. 혁명 후 새로운 공포 정치는 더욱 강력한 형태로 재현됩니다. 그러나 소설은 이즈음에서 혁명의 실패로 끝맺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 이들로 인해, 혁명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해냅니다(다시 한번, 시대의 통념에 굴복할 것인가, 혁명을 통찰해낼 것인가).   


셋째, 안티테제인가 진테제인가? 철학자 헤겔(1770~1831)은 세계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고 설명하며, 모든 사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연관성을 가지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사를 쟁취해 나간다고 주장했습니다. 헤겔에게 ‘진리는 전체’로, ‘오직 스스로의 전개 과정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이를 ‘정반합正反合’ 즉, 테제thesis-안티테제antithesis-진테제synthesis로 도식화했습니다. 테제는 흔히 ‘정립定立’으로 번역되는데 정치적·사회적 운동의 기본 지침이 되는 최초의 강령을, 안티테제는 ‘반정립反定立’으로 최초의 강령을 부정하고 대립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의미합니다. 진테제는 ‘종합綜合’으로 테제와 안티테제의 단계를 거쳐 대립과 모습을 수습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후, 스위스 망명지로부터 귀환한 레닌(1870~1924)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노동자·농민·병사의 대표자로 구성된 평의회)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0대 강령 ‘4월 테제’를 발표했습니다. 거침없는 혁명의 파고는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을 함락하며 혁명을 완수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혁명 직후 러시아는 극심한 내전을 겪고, 스탈린의 ‘반혁명(1928)’을 거치면서 옛 혁명의 동지들을 살해하고 공포 통치를 강화하며 독재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혁명이 안티테제에 의해 좌초된 것으로, 진테제로 나아가지 못한 혁명은 비극의 역사로 점철됩니다. 안티테제에 갇힌 테제의 운명은 언제나 그러합니다. 


텍스트는 언제나 테제로부터 출발하되 언제나 안티테제에 부딪힙니다. 인문의 본질은 테제 혹은 진테제로 구현됩니다. 인문 정신이 자본주의에 갇혀 처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기획이 기껏 안티테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안티테제를 뚫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기획은 출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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