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수치로 재는 게 아니다.
나는 종종 다른 사람과의 행복을 비교한다. 누가 더 행복한지, 누가 더 불행한지. 다른 사람이 더 행복하면 부럽기도 하면서 비뚤어진 마음으로는 시기를 하기도 한다. 내가 더 행복하면 그 사람을 동정하기도 하며 그 사람이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못된 마음으로는 그저 그렇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의 불행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모래성 같은 자존감을 쌓기 위해서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행복을 가진 자를 볼 때마다 파도가 밀려와 모래성을 무너뜨린다. 무너질 걸 알면서도 난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굳이 왜 난 거기에 모래성을 짓고 있었던 걸까? 이따금씩 파도가 올 거란 걸 알면서도 왜 파도 근처에 모래성을 짓고 있는걸까? 모래성 없이 그저 파도를 바라보며, 파라솔 아래에 누워 평온한듯이 지켜보면 안 되는걸까? 쉽게 무너질 행복을 쌓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 다시 파도 근처에 간다. 조금씩 파도와 멀어지려고 애를 쓰면서.
막대한 돈을 갖고, 창창한 커리어를 달리고 있으며, 출중한 외모를 뽐내는 사람을 흔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명언처럼 알고 있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은,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기에, 돈 없이 행복하긴 어렵다'는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태어났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돈은 수치로 비교를 할 수 있으나 행복은 수치로 비교를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비관적인 해석인 부자들이 오히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억지로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면, 행복은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기에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마음 먹기에 따라 부자들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수치로 매겨 통계를 내는 행복 지수가 있지만, 애초부터 왜 행복을 재고 있는 것일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은 은연 중에 행복은 물질적인 가치로 치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과서적인 말을 해보자면, 행복은 수치가 아니다. 어느 사람이라도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며, 이는 비교 선상에 둘 수가 없는 가치다. 당연한 말인 걸 알면서도 왜 행복을 재야하는 가치로 따지려는 걸까?
행복은 값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난 사람마다 행복이 모두 크기가 같지만 다른 모양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의 크기는 같은데 왜 누군가는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는 불행을 느끼는 것일까?
엄청 푹신한 쿠션과 침대가 있는 곳을 떠올려보자, 천장은 풍선으로 가득차 있고 벽도 푹신한 쿠션으로 되어있다. 생각만해도 포근하고 행복해진다. 반면 온통 가시가 가득찬 방을 생각해보자. 발을 조금만 디뎌도 금방 발바닥을 찍어 피가 흐를 것 같은 그런 방. 행복의 모양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이 둥그렇고 푹신해서 오랫동안 껴안고 싶은 모양이다. 불행을 느끼는 사람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쳐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행복의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다. 행복의 근처에 다가갈 수 없으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닐까?
행복은 마치 찰흙 같아서 언제든지 모양이 바뀐다. 오늘은 뾰족해서 아픈 행복일지라도 내일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누구나 행복의 무게가 같다. 그러니 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사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고 시기하며 나의 행복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행복은 얻어지고 잃는 가치가 아니다.
얼마나 큰 행복을 가지냐의 초점에서 벗어나 어떻게 해야 이 행복을 더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밖에 없다. 내가 지금 불행한 건 행복의 크기가 줄은 게 아니라 행복에 가시가 돋쳐있다는 걸 깨닫고, 이 가시가 서서히 안으로 들어가게 해야한다.
'행복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취업이나 승진을 봐도,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내 기분이 달라진다. 좋게 마음을 먹는다면 '나도 곧 해 뜰 날이 올 것'이라며 자신을 위안하겠지만, 나쁘게 마음을 먹으면 '나는 지금 뭐하는 걸까'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과거에 어디서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전에 이 말을 들었을 땐, '행복은 크고 작다'라는 의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살아가면서 비교는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취업이나 승진을 보면, 말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마음 속에서의 행복은 점점 작아져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든다. 그러니까 '행복에는 크기가 있다'라는 의식 때문에 '저 사람의 행복과 내 행복을 비교하니 내 것이 작아 지금 내가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무의식을 억지로 떨쳐내기 위해 마음 먹기에 달린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행복의 크기는 누구나 같고
모양만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자는 거다.
1등석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 가서 좋은 호텔에서 잠을 자고 경치를 즐기는 것도 행복이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나물을 모아서 고추장을 넣고 밥에 쓱싹쓱싹 비벼 먹는 것도 행복이다. 저녁 식사에서 가족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도 행복이다. 유튜브에서 재밌는 영상을 보고 웃는 것도 행복이다. 다 똑같은 크기의 행복이다. 행복을 느낀다면 다 폭신폭신 둥그런 모양의 행복이다.
행복은 모래성이 아니라 모래로 만든 찰흙이다. 누구나 크기나 디자인이 다른 모래성이 아니라 같은 모양과 무게의 찰흙이다. 이 인식을 가지면 저 사람의 행복과 나의 행복의 크기는 같지만, 지금 저 사람은 부드럽고 나는 뾰족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와 상대의 상태를 수용하는 것이다. 어차피 행복의 크기가 같다는 걸 알고, 언제든지 행복의 모양은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급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 행복과 저 사람의 행복의 크기는 같으니 내가 행복을 더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행복은 내 마음 안에 있으니, 행복을 잃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