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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립 Dec 11. 2020

범죄자의 서사는 대본에서 빼주세요.

가해자를 향한 동정심?

* 드라마 <시그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글에 나오는 예시는 가상의 사건입니다.


인생 드라마를 꼽으라면 단연코 <시그널>이다. 김혜수, 조진웅, 이제훈을 필두로 세운 이 드라마는 연기, 스토리, 연출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그러나 스토리에서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홍원동 연쇄 살인사건>이다. 극 중에서 범죄자 김진우(배우 이상엽)는 우울해 보이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 그들을 살인한다. 그리고 그들을 질식시킬 때, “많이 힘들지? 너도 편안하게 해 줄게.”라고 한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했다. 엄마가 울고 있는 김진우를 억지로 여행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하는 말이 “많이 힘들지?”였다. 그런 극심한 아동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선택했던 방법은 존속 살해였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김진우는 또 다른 우울해 보이는 여성을 발견한다. 그 여성의 이름은 유승연. 유승연은 그의 시선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가 느낀 시선은 안타깝게도 호감의 시선이었다. 어느 날, 유승연은 비닐봉지에 담긴 귤을 들고 가다가 떨어뜨린다. 굴러가는 귤은 김진우의 발 앞에서 멈췄다. 사실 김진우는 유승연이 진짜 우울한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그녀를 미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승연은 김진우가 자신을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줄 알고, 호감의 표시로 귤을 김진우의 손에 쥐여준다. 이런 선행을 처음 받아보는 김진우는 놀라서 귤을 떨어뜨리고 겁에 질린 듯 뛰어간다.

엇갈린 시선의 결말은 비참했다. 유승연은 결국 김진우에게 살해당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전과 다른 방식으로 죽는다. 호감이란 감정을 유승연에게 처음 느껴봤지만, 그 감정이 낯설어서 호감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호감을 깨닫지 못했을 뿐, 살해 방식이 달라진 것으로 보아 심경의 변화는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재한이 과거의 김진우를 체포해서 과거가 뒤바뀌고, 유승연은 살게 된다.)


이 스토리가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아동학대가 불러일으킨 끔찍한 결말’ 이란 걸 당연히 안다. 아이들이 양육자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 지금도 아동학대의 피해자는 사각지대에서 양육자에게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원동 사건>이 아쉬운 이유는 가해자가 결국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동학대의 피해자.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알겠지만, 진짜 아동학대의 피해자들이 이 이야기를 본다면 어떨까?


드라마 <시그널> 중 아동학대의 장면


아동학대를 당한 모두가 김진우처럼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어릴 적의 기억으로 고통받지만, 대부분은 김진우처럼 그런 비뚤어진 삶을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김진우의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아, 저런 환경에서 자라서 아이가 비뚤어지게 컸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게 아쉬운 부분이다.


왜 우리가 범죄자의 서사를 보면서 동정심을 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동학대가 얼마나 아이들을 짓밟는 일인지 안다. 하지만 왜 그런 아이들이 드라마에서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가? 아동학대의 잔인함을 보여주려거든,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후에 느끼는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것이 차라리 낫다.


정말로 범죄자가 불우한 과거를 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피해자는 죽었거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모자라 왜 우리가 가해자의 과거 가정환경을 얘기하며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라고 안타깝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좋지 못한 과거’ 하나일 뿐이라고 단정 지어 얘기할 수 있을까? 절망적인 과거가 범죄를 저지른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사람의 심리나 유전적 요인 등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슴으로는 이해되는 유감스러운 범죄도 많다. 어떤 이유로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이 주제에서 다루고자 하는 범죄 동기는 피해자에게 큰 억하심정이 없었지만, 개인의 잘못된 감정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출처 Unsplash @freegraphictoday


뉴스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OO동 연쇄 살인의 가해자, 알고 보니 고아로 자라….”, “돈이 없어서 저지른 범죄”처럼 범죄자의 서사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우리는 범죄자의 서사를 궁금해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다.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포커스를 맞춘 헤드라인이어야 하는데, 왜 그들의 배경에 포커스를 맞춘 헤드라인이어야 하는가?


서사는 아니지만, 어처구니없는 범죄 동기가 헤드라인에 걸리기도 한다. “점원이 상냥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발적인 살인.”, “헤어지자는 말에 연인을 차로 친 범죄자.” 등등. 너무나도 어이없는 이유다. (어떠한 이유라고 해도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다. 죽일만한 정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어떤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괜히 그들이 되지도 않는 핑계를 만들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것뿐이다.


저런 헤드라인이 시선을 끌 수는 있지만, 잘못하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어휴, 그러게 상냥하게 대해주지.”, “헤어지자고만 안 했으면 저런 일 안 생기지.” 이게 맞는 반응일까? 그건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짓이다. 설령 피해자가 상냥하게 대하고, 고백을 받아줬더라도 후에 또 다른 피해자는 생겼을 것이다. 이런 반응이 여론이 되면, 범죄자들에게 ‘대중들도 저랑 똑같이 생각한다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까요.’라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것 밖에 안 된다.


왜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는가? 범죄의 원인은 범죄자에게 있다. 그들이 그런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좀 다를지 모르겠다. 뉴스나 기사에는 연쇄 살인자를 ‘역대급 살인마’, ‘극악무도한 악마’, ‘희대의 연쇄살인마’ 등으로 '신화화'해서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불리는 칭호, 수식어에 뿌듯해한다. 자신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들을 '악마', '살인마'처럼 신화화해서 불러줌으로써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일어났던 N번방 사건에서 범죄자는 “악마 같은 삶에서 벗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일절 없었고, 뜬금없는 언론인을 소환해서 N번방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했다. 또 그는 자신이 ‘악마’ 같다고 했다. 아마 그런 부류들은 스스로 악마라고 칭하면서 중2병처럼 찌질한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저런 발언을 한 것 자체도 아직 그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보면 그냥 더러운 성범죄자일 뿐인데 말이다. 범죄심리학자이신 이수정 교수님도 "조주빈, 자신을 '악마'라며 과대 포장한 것. 조주빈, 온라인서는 '전지전능' 자의식 과잉이다."라고 말씀하셨다.(출처 JTBC 인터뷰)


출처 Unsplash @markus-spiske


범죄자면 그냥 범죄자다. 쓸데없는 서사·이유·수식어는 필요 없다. 대중들에게 정말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그때 그들의 서사, 이유, 수식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는 스토리상 범죄의 이유가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범죄자의 안타까운 과거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한다.’도 맞는 말이지만, 드라마에서 가해자의 감정에 이입해서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시청자도 있고, 드라마에 나오는 사건과 비슷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극 중에선 피해자의 서사가 필요할 수 있겠지만 언론에선 피해자의 서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 또한 피해자와 그의 가족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지역 인터넷 카페에서 “OO동에 사는 OO이라네요. 가족은 몇 명 있고….”라는 정보가 일파만파 퍼진다. 


언론 등의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어떤 글, 어떤 반응이 피해자를 지켜줄 수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tvN 드라마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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