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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립 Jan 13. 2021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지 않다.

할머니에게 내리사랑은 없었다.

인터넷의 ‘할머니’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응은 “우리 할머니 보고 싶어.”, “할머니 너무 좋아.” 등등이다. 전반적으로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는 댓글이다. 난 이런 반응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할머니께선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 부터 중학생 때까지 같이 사시다가 고등학생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릴 적, 가정환경 상 어쩔 수 없이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께선 우리 가족과 한 집에 살면서 10년 동안 집안일을 하셨다. 우리 자매를 챙겨주시고, 집안일을 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다. 국수를 먹을 때도 항상 할머니는 적게 드시고, 손녀를 많이 챙겨주셨듯이 우리에게 애정이 있으셨다.


아이러니하게, 난 감사하다고 느끼는 데도 할머니에 대해 애정이 딱히 없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할머니랑 친하게 지냈고, 할머니도 나를 좋아하셨다. 그런데도 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 중에서 할머니의 아들, 우리 아빠 밖에 몰랐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아빠랑 놀고 싶어서 아빠 무릎에 앉거나 치댔다. 그러면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빠 일하고 와서 힘든데 치대지 마라.”


난 무안한 마음에 아빠 무릎에서 내려왔다. 할머니는 매번 “너희 아빠.”를 말하면서 아빠가 돈 벌어오는데 하면서 아빠가 벌어오신 돈을 아까워하셨다. 마치 엄마는 돈을 벌어다주지 않는 것처럼. 마치 우리만 아빠의 돈을 다 거덜 내는 것처럼.


할머니께서 살아계셨을 땐 아빠가 돈 관리를 하셨다. 말이 아빠지, 사실 생활비는 다 할머니가 관리하셨다. 할머니는 악착같이 아끼셨다. 그렇게 전깃불도 아끼고 싶으셔서 낮엔 형광등 불을 꺼놓고 공부하게 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 할머니는 매번 "낮에 햇빛도 훤한데 불 꺼놓고 해도 돼." 라고 말씀하셨다. 내 머리 그림자에 글자가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얼굴을 책에 완전히 갖다대고 봤다. 그리고 그 자세가 습관이 되었고, 학원 선생님께서는 내 자세가 좋지 않다며 바로 고쳐주시기도 했다. 그때서야 알았다. 내 자세가 좋지 않다는 걸.

그렇게 악착같이 아낀 덕분에 김치냉장고를 샀다. 김치냉장고 뿐만아니라 우린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고작 전기세 아껴서 김치냉장고를 사고,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단정지어 말할 순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고작 전기세 아끼려고 녀에게 나쁜 습관이 들게 했다는 것이다.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렇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의 손자녀들이 다 모인다. 그러면 우리 자매는 뒷전이 된다. 우리는 매일 보는 손녀여서 그런가 할머니는 제일 어린 사촌 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놀아주셨다.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도 “너희 아빠” 염불은 멈추지 않으셨다. 친척집에서 놀 사람이 없어서 두 자매가 아빠 옆에 꼭 붙어있으면 “너희 아빠 하루 종일 운전해서 왔는데 힘들게 치대지 마라.”라고 어른들 앞에서 면박을 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다. 담낭암으로 시작해서 폐, 간 등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고, 병원이랑 더 가까운 고모와 사촌 언니가 할머니를 간호했다. 우리 부모님도 자주 병원에 가며 할머니를 간호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그런지 매번 본인의 딸만 찾으셨다. 고모가 잠시 본인 집에 들렀을 때, 할머니는 소변을 보고 싶어하셨다. 엄마는 그걸 아시고 엄마가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무조건 “싫다.” 면서 몇 번을 거절하고, 고모가 올 때까지 기다리셨다.


할머니는 엄마를 싫어했다. 엄마가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조건 엄마가 불리한 쪽으로 얘기하거나 사실과는 다르게 얘기했다. 할머니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우리가 어릴 때, 엄마는 자식들 학원비라도 벌려고 일하러 다니다가 사기를 당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엄마가 춤바람이 나 돌아다녀서 돈을 남자한테 다 썼다고 말하고 다니셨다. 또, 우리한테도 엄마는 “독한 X”이라며 세뇌시켰다. 그래서 어릴 땐 엄마가 정말 계모인 줄 알았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해주신 덕분에 친척들, 그 당시 동네 사람들한테는 우리 엄마가 “못된 X”이 되었다. 물론 친척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난 친척들도 싫다. 엄마가 사실을 말할 어떠한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 후에 난 아빠한테 말했다. 난 할머니한테 애정을 못 느끼겠다고, 딱히 그립지 않다고. 그러자 아빠는 할머니가 젊을 때부터 남편 없이 아이들한테 치어 받고 살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막내 삼촌도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나와 똑같이 얘기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리사랑이란 게 있는데, 너희 할머니는 그런 게 없었다.' 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지금까지 우리를 키워줬던 건 그저 본인의 아들이 힘들까봐였다. 아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의무감으로 10년 동안 집안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애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사랑은 온통 아빠에게로 가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 오셨는지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할머니가 그런 고통을 겪으셨다고 해서 우리 자매와 엄마가 겪은 상처가 당연하다고 절대 합리화할 수 없다. 내가 매정한 손녀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들은 내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받은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


결국, 난 할머니가 나에게 실질적으로 잘해준 것보다 정서적으로 잘해주지 못한 것이 커서 할머니가 그립지 않은 것이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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