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맘 때 쯤, 일본으로 첫 해외여행을 갔다. 일본에 가기 전, 어떤 기념품과 관광지가 유명한지 어떤 음식점이 맛있는지 꼼꼼히 계획을 짰다. 해외로 가는 첫 비행기를 타는지라 괜히 긴장되었다. 일본행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입국 신고서를 줬다. 이미 어떻게 작성하는지 다 알아왔던 나는 휴대폰에 써온 것과 비교를 하며 써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비행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흔들림이 지속되었기에 항공기 자체에 의심을 품기까지 했다. 마치 파도가 치는 배 안에서 책을 읽거나,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보는 것 같았다. 속에선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았고, 난 옆에 있는 언니에게 대신 작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난 창 밖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다행히 별 일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 숙소에 도착했다. 계획한 일정을 차근차근 진행했고, 일본 드럭 스토어에서 여러 물건들을 사면서 멀미약도 구매했다.
한국으로 가는 날, 공항에서 멀미약을 꺼냈다. 캡슐 형태의 약은 반은 파란색, 반은 투명색으로 안에 작은 알갱이들이 꽉 차있었다. 외국 약이라 먹기가 조금 꺼려졌지만, 일본의 멀미약이 유명하다는 네티즌들의 말을 믿고 약을 삼켰다. 약의 효능 덕분인지 약을 먹으니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멀미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약국에선 멀미약으로 귀 밑에 붙이는 제품과 씹어서 먹는 약을 주로 추천해주었다. 귀 밑에 붙이는 제품은 손으로 만지면 안되는 주의점이 있고, 씹어서 먹는 약은 약의 맛을 느껴야했기에 우리나라에선 멀미약을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미 일본 멀미약의 효능을 체험했고, 물과 함께 쉽게 먹을 수 있는 형태가 마음에 들었기에 유럽여행 때도 그 멀미약을 챙겼다.
멀미약 뿐만아니라 일본을 방문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드럭 스토어에 가면 파스, 소화제, 진통제 등등이 효과가 좋다면서, 일본에 가면 약을 쟁여와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나도 유명하다고 얘기하는 것들을 사왔고, 효과도 봤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난, 일본의 약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유는 일본이 강제로 진행한 생체실험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마루타로 불려지며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거의 알고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은 731부대를 결성하여 한국인과 중국인, 소련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 중국에선 희생자의 수가 1,500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집계된 것만 그 정도일 뿐,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생명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극악무도한 짓을 했다.
그렇게 힘 없는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생체실험을 자행한 결과,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은 의료기술의 향상과 해부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도 일본처럼 약, 영양제가 유명하고, 의료기기 제조회사인 지멘스도 유명한 것이다.) 그 나라가 우수한 의료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생체실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이러니하다. 사람을 희생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얻다니. 일본은 죄 없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짓을 벌인 결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의료 기술이 20여 년 앞서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일본의 약이 유명한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 더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약인데도 한국인에게 더 잘 듣는 이유가 있다는 것. 그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기 때문에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잘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731부대의 주범들이 일본 의학계 주류로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한 지식으로 그들의 자국민을 치료하고, 자국민을 위한 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생체실험을 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 대상으로 해서,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잘 맞다는 추측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약이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잘 맞는다는 설은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아니나 그 내용을 본 순간, 몇 년 전에 먹은 멀미약이 속에서 올라올 것만 같았다. 희생 당한 한국인들에 대한 죄송함과 잔인하기 그지없던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괜히 일본 약이 잘 들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분 탓도 있겠지만, 그들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고, 그 실험으로 일본의 의료 기술 체제를 갖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 여행을 간 것 자체만으로도 후회되었다. 그러게 왜 일본으로 여행갔냐고 나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그 이후 반성했으며 웬만하면 일본 제품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정지을 순 없겠지만, 결국 일본의 멀미약은 우리 조상들의 피와 한. 그리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강제적인 희생의 산물이었다. 그 조상의 피가 흐르는 나였기 때문에 그 멀미약이 나에게 잘 맞았던 것이었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구글, 일본 멀미약 아네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