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자영업자의 큰 장점은 상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큰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양날의 검과도 같다.
상사가 없는 자영업자는 내가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 상의할 사람이 마땅히 없다.
모든 것이 본인의 결정이고, 모든 것이 본인이 결정한 것에 따른 대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이 안 닿은 것들이 없는데 그 과정에서 오는 고민이나 고충을 부모님에게 상담하자니 부모님은 걱정하실 게 뻔하고, 친구들은 백 퍼센트 이해해주기 어렵고, 그렇다고 직원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이야기하기 가장 편하고 좋은 대상은 주변의 또 다른 자영업자들이다.
수도 없이 로스팅을 하고, 프로파일을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망한 결과물들은 와르르 버리며 스스로가 한심해서 우는 날도 부지기수던 8월의 어느 날.
건너편 S 로스터리 사장님께서 놀러 오셨다.
간단한 브루잉 추출 방식을 물어보시던 중, 내 눈이 맛탱이가 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는지
사장님께서 대뜸 한 마디를 던지셨다.
"사장님. 번아웃 오면 안 돼요. 잘하고 있어요 지금."
최악의 기분을 겪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게 한 잘하고 있다는 그 한 마디.
잘하고 있다.
툴툴 털고 일어나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기영차 일어나서 꾸역꾸역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게 만든 그 말의 힘.
9월 17일
S 로스터리 사장님네 가게에 놀러 갔다. 이번에는 사장님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달 전쯤 로스터기를 청소하고 나서 열 조절이 예전이랑 많이 틀어져서 한참을 애먹으셨다고 한다. 솔직히 지금 나가는 커피도 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사장님 지치지 마세요. 지금 느끼시는 감정은 계속 계속해나가면 극복이 되는 감정이라고 저한테 얘기해주셨어요."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예. 그리고 그 말씀이 얼마나 저한테 큰 도움이 됐는데요."
"...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한테."
이내 손님들이 몰려와 눈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한 그날 저녁.
디엠 하나가 날아왔다.
"존경하는 사장님 안녕하세요.
콜롬비아 살짝 맛봤는데 떨떠름하고 별로더라고요.
페루 내추럴도 좀 안 잡힌 것 같고 로스팅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진 않은 것 같아요.
특히 드셨던 콜롬비아는 좀 많이 나가리네요. 빼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문을 닫을 수도 없고 요즘 제가 이런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엘 모리 또도 그렇고 그전에 콜롬비아 무산소였나? 거짓말 안 보태고 놀랄 정도로 맛있게 마셨어요.
저희 손님들한테도 사장님께서 저보다 더 잘하신다고 요즘 솔직한 추천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푹 쉬시고 나중에 괜찮으시다면 자영업자로서, 커피 하는 사람으로서 직원분이랑 같이
식사자리도 함께 해요. 늘 고맙습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9월 19일
며칠 전 선물 받은 케이크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 근처 D 브런치 가게 사장님께 한 조각을 나눠드렸었다.
그랬더니 오늘 사장님께서 직접 만든 가을 신메뉴 케이크를 큼지막하게 한 조각 담아서 접시를 돌려주셨다.
둘이서 신명 나게 수다를 떨다가 얼마 전에 악의적인 영수증 리뷰를 받은 사연을 하소연했다.
사장님께서는 '나더러 사장님은 밑으로 내려간 눈꼬리가 문제'라며. 언제 한 번 날 잡고 화장을 제대로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셨다.
문득 가게 문을 닫고 사장님께 눈 화장을 받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브런치 가게 사장님께 받은 케이크는 또 반으로 잘라 위층 애견용품 편집샵을 운영하시는 사장님과 나눠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