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뒷모습
24
생일
이번 그의 생일에는 그림용 타블렛을 선물했다.
항상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꼭 사줘야지, 했었던 거다.
거의 하루 종일 고르고 골라 내 마음에 드는 걸 사서는, 우리 집으로 배송받아서 다시 이것저것 담아서 그의 자취집으로 보냈다.
아마 그 썰렁한 자취집에서는 본인 살기도 근근해서 아마 그림 따위는 생각도 못하겠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나를 위해 그림 하나 정도 그려주었으면 좋겠다.
겨울
절친 J가 깜짝 발표를 했다.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H 언니 또한 2년이 넘는 이 연애를 아예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아는 모든 지인이 충격을 받았다.
무려 2년 넘은 비밀연애라. 그녀 말로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다들 반대할 것 같아 얘기를 안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우리는 거의 청문회 하는 기분으로 그녀 집에 방문한 후 밤새도록 얘기를 하고 잠을 잤다. 그래도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잘 살 것 같았다. 분명 나보다 행복하게 살 것이다.
다음날 일요일에는 조금 일찍 일어나서 그녀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 두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고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그는 야구에 미쳐 있는 사람 중 한 명인데, 마침 한창 인기인 야구 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신경한(?) 성격 탓에 티켓팅에 실패를 해서 대신 농구라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쩐지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예정이 변경돼서(늘 이런 식이다), 그의 서울 본가에 가서 그의 누나와 같이 야구 중계를 보기로 했다.
그는 서울을 잘 모르는 나를 위해 터미널로 마중 나와 있었다. 본가로 가는 길에 지하철 역 안 지하상가에서 온갖 구경을 하고, 자취방에서 쓸 약통과 양말, 가방을 산다며 돌아다녔다.
그는 정말 소박한 사람이다. 그 정도의 나이가 된 직장 있는 남자가 지하상가에서 만원에 파는 백팩을 산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서는, 집에 오자마자 누나에게 자랑을 한다.
그는 양말들 산 것 중에 하나를 나에게 줬다. 나는 그걸 한 번도 신지 않고 본가 내 비밀상자에 언제까지고 보관했다.
그는 타블렛 선물을 받은 것이 부담됐는지, 뭐라도 나에게 사주고 싶어서는 안달이었다.
결국엔 다이소에서 내가 필요하다고 한 꼬리빗을 사주고, 옷가게에서는 연한 회색 니트티를 사주고는 뿌듯해했다.
나는 늘 그랬듯 웃었지만, 울고 싶었다.
그의 본가에 도착하니 누나가 벌써 와 계셨다.
그의 누나는 그의 가족들이 그렇듯 역시 꾸밈없고, 해맑고, 재밌는 분이었다. 덕분에 저번처럼 전혀 어색함 없이 소파 밑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의 다리에 기대 피자를 먹었다.
야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던 나지만, 누나가 응원하는 두산을 같이 응원했다. 결국 두산은 졌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야구를 다 보고 누나와 인사를 하고 5시쯤 종로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 들렀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각자의 자취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에 갔다.
그런데 우리의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대전으로 가는 모든 버스가 매진된 것이다.
그는 대전이 이렇게 핫플레이스였어? 라며 충격에 빠졌다.
우리는 기차도 찾아보고 별의별 생각을 다 쥐어짜 보았지만 결국엔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중간지점인 청주에 간 후, 거기서 대전을 가기로 했다. 우리는 나란히 청주행 버스를 탔고, 기사님은 불을 꺼주었다. 나는 비스듬히 좌석에 기대 나직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청주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대전행 버스는 9시에 곧바로 출발한 직후였고, 다음 차는 10시 30분 완행 막차였다. 우리는 경악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막차를 끊고는 터덜터덜 케이가 주차된 아파트로 걸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항상 이런 거야!"
결국 그는 웃음과 울부짖음의 그 중간 어디쯤을 터뜨렸다. 나는 옆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
꼭 우리 둘이 만나면 사건이 터진다는 시트콤 같은 상황을 그저 즐기며, 높다란 아파트 담벼락 아래를 걸었다.
알고 보니 그는 10시에 다른 사람을 픽업해서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늘 그렇듯 그의 일과는 내게서 끝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그를 먼저 보내야만 했다.
10시에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나는 카페에 들어가 잠깐 있다가, 30분이 되어 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