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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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학생들이 난리를 치는 통에 빼빼로데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에게 주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걸로 봐서 요즘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쉬는 시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 곧바로 파리바게뜨 기프티콘을 보냈다. 한참 후에 문자가 왔다.
먼저 보내려고 했는데 수업 때문이라며 찡찡댄다. 말이나 고맙네. 나는 반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기뻤다.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가서 퇴근 무렵에야 카톡이 왔다. 카톡 기프티콘이 안된다며 낑낑대고 있단다. 결국 아무것도 오지 않은 채 퇴근 시간이 되었다. K가 우리 학교 쪽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학교 밖을 나와도 아무도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카톡으로 뭔가를 보내는 데에 실패했는지, 뭘 먹고 싶냐고 얘기해 달라고 보챈다. 뭘 먹고 싶긴. 당신이랑 먹는 거면 다 좋지. 나는 같이 먹어야 한다며 떼를 썼다. 그런데,
"오빠랑 먹는 거면 다 좋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K가 바로 뒤에 있었다. 그가 내 말을 따라 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모를 뻔했다는 생각에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경험하고 말았다.
우리는 뭐라고 얘기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전화를 끊었다. K에게는 지난 콘서트에서 내가 밥을 사서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랬더니 K는 '나도 사달라고 해야겠다'며 그렇게 넘어갔다. 바보 같은 내 처지가 최악으로 바보 같았던 날이었다.
집에 와서도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아니 애초에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그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일은 잘 얼버무렸냐며 물어본다. 설명했더니 그도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그는 응원하던 야구 넥센 팀이 져서 우울하다고 했다. 그래봤자 또 사람들과 만나 즐거울 사람이란 걸 안다. 우리는 몇 마디 더 하고 통화를 마쳤다.
오후에 집에 와서는 카톡을 했다. 아이들에게 20개가 넘는 빼빼로를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선생님들한테서도 2,3개... 거기다 대고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나일뿐이다. 애초에 자격이란 게 없으니 할 말이라고는 그저 '인기가 너무 많아도 탈이야' 정도다.
자격.
이 단어가 요즘따라 너무나 가슴을 쥐어뜯어 놓는다.
아무튼 그는 나 한 명에게만 빼빼로를 줄 거라고 한다. 나는 반의 반도 믿기지 않는다. 기프티콘이 안되니, 다른 방법으로 보내겠다고는 하는데, 늘 말만 많은 사람이라 신뢰감이라곤 없다.
그냥 하루 재워주면 될 텐데.라는 말은 그저 속으로 되뇔 뿐이다. 기껏 용기를 내서 '사랑을 달라'라고 했더니, 카톡 이모티콘으로 잔뜩 하트가 그려진 캐릭터를 종류별로 다 보낸다. 넘쳐나는 이모티콘을 보며 나는 그 이모티콘일 뿐인 것들을 캡쳐해 놓았다.
11월 13일
고전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이제야 읽었다. 분량이 많지도 않아서 학교 프린트 양면 모아 찍기로 대충 찍어서는, 집에 와서 누워 뒹굴며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이 소설 덕분에 청년들의 모방 자살이 많아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주인공의 성격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괴테가 묘사한 마음은 완벽하게 나와 같았다.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에게 권총을 빌리는 순간,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도.
인터넷으로 몇몇 블로그의 후기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요즘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 이야기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겪어보지 않으면 완벽히 공감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그토록 절절하고 아프게 읽은 게 못내 슬프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싶다. 간절하다. 권총같이 단박에 삶을 지울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과연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설령 도구가 없다 해도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너무나 잘 안다. 이룰 수 없는 걸. 그런 채로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이렇게 괴로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