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32

일곱 번째 밤

by 에스

32



11월


일곱 번째 밤


"ㅇㅇ선생님, 잠시 교무실로 와보시겠어요?"


빌어먹게도 힘든 하루였다.
이제껏 믿어왔던 내 학생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걸 경험해야만 했다.

그 학생은 내 앞에서는 너무나 나를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교무실 앞 복도에 놓인 소리함에 나에 대한 비난을 몇 번이나 넣어 놓은 그 학생. 배신감과 절망.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의문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미칠 것 같았다.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오늘 M 형이 군 제대 직전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저녁에 볼 건데, 같이 볼래?"


K가 넌지시 물어왔지만 나는 있지도 않은 회식을 핑계 대고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퇴근하고 아파트에 들어섰더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두 사람이 아파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아는 체를 했고, 나는 잠깐 집에 들를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M 오빠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깐이라도 보자고 했다. 나는 그 따뜻한 말에 마음이 바뀌어 8시쯤 나가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점심도 먹지 않은 채, 저녁도 먹기 싫어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그 사람에게 메신저로 쪽지라도 쓰기로 했다.


쓰던 도중 절망과 패배감에 더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까지 밀려왔다.
그러자 갑자기 지금껏 해 본 적이 없었던 생각이 불쑥 끼어들었다.


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보러 가자!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스로도 기가 막혔지만 이미 그 순간 나는 시외버스터미널 시간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낮에 보건실에서 받아먹은 두 알의 비염약 때문에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 탓인지 제대로 판단하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8시쯤 M오빠와 K를 보기 위해 카페베네로 나갔다. 예상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반가웠고, 고생을 많이 한 오빠가 대견했다. 우리는 그렇게 음료수를 먹으며 얘기를 하다가 8시 50분쯤 헤어졌다.


나는 부장언니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고는 K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터미널로 향했다. 8시 59분에 도착했는데 곧바로 9시 차가 있어서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에는 잠깐이지만 후회를 했다. 미쳤나 보다...라고. 하지만 내리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시간 반 가까이를 제대로 잠도 자지 않은 채, 약에 취해 부유하는 정신으로 맨 앞자리에서 눈앞의 풍경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응시했다.


터미널에 내리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어쩐다? 내리기 10분 전쯤 카톡을 했는데 읽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다 되어서? 그렇다면 그가 집에 도착한다면 연락이 올 것이다. 아마 늦어도 11시 전에.


그게 아니면 자고 있는 것? 이 경우는 답이 없다. 직접 찾아가는 것 외에는. 가능하면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집을 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스토커 같다.


카페에서 전화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그 근처의 모든 카페는 11시까지만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 근처라도 가기로 마음먹고는 버스를 기다렸다.


하지만 10분 넘게 기다리고 나서야, 버스가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광판에는 분명히 19분 후에 도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결국 택시에 타서는 그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로 가 달라고 했다.


택시기사는 어두컴컴한 학교 앞에 나를 내려주고 사라졌다.


휴대폰 내비에는 그의 원룸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 근처의 아이파크를 내비에 찍고 걸었다. 그런데 절전모드로 해놔서인지 내비가 말을 안 듣는 것도 모르고, 나는 이상한 방향으로 걸었던 것 같다. 굉장히 높은 담벼락을 한참 걸은 후에야 아이파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은 깜깜하고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다 아저씨나 남자일 뿐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걸음 소리를 죽이며 컴컴한 거리를 걸었다.


최악의 경우엔 어떻게 할까? 만약 집에 없다면? 여기에 없다면?


생각해 보니 그와의 만남은 이제껏 뭐 하나 내 예상대로 되지 않았었다.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오늘도 그의 얼굴조차 못 보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겨우겨우 아이파크를 지나 원룸촌에 도착했다. 물론 거기서도 한 번 헤매고는 한 바퀴를 돌아 도착할 수 있었다.


원룸촌은 더욱더 난코스였다. 빌라가 하나같이 똑같이 생겨서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인기척 없는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그가 사는 원룸을 찾을 수 있었다. 힐끗거리며 주차장을 보니 차가 없었다. 불도 꺼져 있다.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가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문을 두드려 보고 없으면 그 앞에서 쪼그리고 밤을 보내야지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오는 그의 집. 한참을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예상대로 조용하다. 예전 주공아파트에 살던 시절, 술 취한 사람이 몇 번인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고 했었다. 아마 집에 있어도 모르는 척했겠지. 나는 두 번 더 초인종을 눌렀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손으로 문을 똑똑똑 하고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계속 몇 번이나 두드리고 나서야 그가 '누구세요'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력이 다 빠져 문 앞에 웅크린 채 대답했고, 그가 문을 열고는 경악했다.


하필 오늘, 회식을 했고, 하필 오늘, 안 먹는 술을 먹고 8시부터 뻗어 있었다고 한다. 역시나 뭐 하나 되는 게 없군. 나는 쪽팔리니까 불 켜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너무 놀라 멍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쓰러졌다. 공복 상태에 먹은 약과 한 시간 남짓 추위 속에서 얼었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를 찾아온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자책감도 함께. 방바닥에는 온갖 것들이 널브러져 있어 마치 이사하던 날의 옥천 같았다. 우리는 그나마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


그는 날 혼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그저 대단하다며, 가끔씩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제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어제는 아는 동생이 와서 자고 갔다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몸을 떨었다.


그를 보면 울음이 터져버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를 안고 있으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가만히 놔둔 채 그는 내년 7월에 결혼한다고 말했다. 빠르면 3월. 나는 말없이 그 얘기를 들었다. 예전엔 그래도 뭐라도 내뱉던 입이, 이젠 아무런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그는 기침을 연실 해댔다. 감기가 덜 나은 모양이다. 이불을 꼭 덮고는 우리는 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오밤중의 내 대모험 이야기도 하는 동안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들어주었다. 내가 한밤중의 도로에서 차에 치여 당신에 대해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가 기가 차서 그런 건 드라마라며 대꾸했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나 때문에 단잠에서 깨서인지, 휴대폰을 한동안 보더니 한참 후에야 끄고 잠들었다.


나는 거의 깜빡깜빡하며 밤을 보냈다.


필사적으로 잠을 자지 않으려 하며(애초에 천둥같이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잘 수도 없지만) 그를 꼭 껴안았다. 맞닿은 손을 잡아도, 깍지를 껴 봐도, 허리를 끌어안고 토닥여도 그저 쿨쿨 잘 자는 사람. 그래도 그 역시 잠깐잠깐 잠을 깨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잔다. 덕분에 얼굴을 보러 왔는데도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고 깼더니 그가 이쪽을 향해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코앞에 단정히 감은 눈이 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 입 맞추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이내 그가 몸을 돌리며 잡았던 손을 떼어 버렸다. 나는 다 차버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는 언제까지나 그의 뒤통수에 뻗친 머리칼을 바라본다. 그는 그렇게 자다 말고 다시 똑바로 누워 내 손을 잡아준다.


이 남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제쯤 알 수 있을까.


허리를 끌어안고 자는데, 그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가위에 눌린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움찔거리길래 손으로 토닥여주었다. 그는 그러다가 갑자기 힘들게 잠에서 깨서는, 성희롱 당하는 꿈을 꿨다며,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그는 배를 다 내놓고 잔다. 만져봤더니 얼굴처럼 매끄럽고 차갑다. 사람의 피부라기 보단 파충류의 감촉이려나 싶을 정도로 착 달라붙는다.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는 배를 꼭 껴안는다.


눈을 깜빡거리는 내내 창문 밖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불빛이 마치 새벽 동이 트는 것 같아서 나는 그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6시에 알람이 울렸다. 나는 단번에 포기하고는 7시 15분에 알람을 맞추었다. 그는 꿈뻑꿈뻑 졸면서도 내가 언제 갈 건지 물어봤다. 나는 1교시에 수업이 없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머리 위로 올린 한 손을 내려 팔베개를 했더니 밤새 옆으로 누웠던 몸이 좀 편해졌다. 진작에 팔베개 할걸 그랬다. 우리는 몇 마디를 또 나누었다.


그러더니 그가 몸을 돌려 나를 안아주었다.


항상 내 쪽에서 귀찮게 꼭 붙어 잤는데, 처음으로 먼저 안아주었다.


나도 허리에 팔을 돌려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쿵쿵쿵쿵 하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듣고 있으니 점점 박동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낮게 뛰는 그 소리 때문인지 그 밤 처음으로 푹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날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같이 연가나 병가 낼래?라고 물어봤지만, 그는 수업 빠지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며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나도 훌쩍 학교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둘 다 거지꼴로 원룸촌의 새벽 거리를 걸었다.


나는 그제야 밤새 고민한 끝에 하기로 결심한 말을 꺼냈다.


"오빠."

"왜?"

"결혼 축하해."


는 '그걸 믿었어?'라며 초를 쳤다. 결혼까진 생각 안 했다면서 나를 열받게 만든다. 마침 그때 택시가 왔고, 나는 '이 택시 때문에 오빠가 산 줄 알어'라고 엄포를 놓고는 택시에 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집으로 왔고, 나는 약국에서 약을 사 학교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 간간히 몇 번인가 괜찮냐고 카톡이 왔다. 오늘은 뻘짓 하지 말고 푹 쉬라는 카톡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어제 점심부터 이어진 공복과 몸의 피로로 온종일 정신이 희미했다.


퇴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며 주차장 쪽으로 나갔더니 이 근방에 살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통화를 했다. 어제 얘기했던 대로 서울에 가고 있는 중이랜다.


길고양이는 전화를 하는 내내 내 곁에 왔다가 도망친다. 하지만 아예 도망쳐버리진 않는다.


그 모습이 꼭 그 사람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몇 마디 했었던 것 같다.


"오빠는 이기적이야"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야~]


"오빠는 한 층 더 이기적이지. 그리고 욕심도 많아. 욕심쟁이"


[........]


그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번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왜 '그러니까 알아줘'라고 대답한 걸까.


그 말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라고 말했다. 그 말은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미칠 것 같다.


정말 차라도 치여 그에 대한 건 싸그리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너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내가 얼마나 너라는 존재를 사랑했었는지를, 전부. 전부 다.


그냥 잊어버렸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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