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41

한 쪽만 망가지는 관계

by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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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랜드 비슷한 곳이었다.
눈앞에 진짜 엄청 높고 긴 미끄럼틀이 다닥다닥 붙어서 시야 가득 여러 개가 있었다.
어린이들이 타고 난리였는데, 미끄럼틀마다 내려오는 길이 다른 것 같았다.
나와 그는 한참을 기다렸다.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른쪽 맨 끝에 서서 하나만 노렸다. 나는 결국 왼쪽으로 가 어떤 미끄럼틀을 타는 데 성공했다. 코스는 그냥 죽-내려오는 무난한 미끄럼틀이었다.
내려와서 그에게 갔는데, 그새 그도 타고 내려왔다고 하며 웃었다. 그의 얼굴이 진짜 땀투성이였다.


우리는 미끄럼틀 뒤로 돌아가 에버랜드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가 물이 먹고 싶다고 하자 내가 물건 보관함을 열었더니 안에 생수통 2개와 음료수통 2개가 있었다. 생수는 그가 사다 놓고, 음료수통은 내가 사다 놓은 건데 안에 물이 들어 있었다.


그가 생수를 집자 내가 내가 사놓은 걸 건넸다. 그가 물이 먹고 싶은 거라고 하자 내가 이것도 물이었다고 했고 그가 웃었다.


3월 16일
오래오래 함께하자는 말.
나에게는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서러운 말인데,


3월 18일
며칠 전 월요일에 동학년 젊은 여자들끼리 저녁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그들과 발령동기인 체육전담도 같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인데, 사범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입이 걸걸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치킨집으로 옮겨 술을 마셨다. 재밌게 놀다가 어쩌다 보니 그 사람 얘기도 나왔고, 체육오빠가 그 사람에게 소개팅을 시켜줬었다고 들었다.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연락처만 알려 주고 몇 주 뒤에 만나겠지,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이에만 두 번을 만났다며. 마냥 너무하네 싶다가도, 정말 조급하고 불안해 보여서 오히려 안쓰러웠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서 카톡이 왔고, 어쩌다 보니 그 근처에서 집에 가려던 참이라 그를 오라고 불렀다. 그는 당연스럽지만, 우리와 어울려서 정말 재미있게 얘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 1시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방향이 같은 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우리는 파리바게뜨에 들러 그가 먹을 아침 빵을 샀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가방에도 딸기크림빵이 하나 담겨 있었다.
그는 술을 먹지 않아서 케이로 나를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나는 차문을 닫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2층쯤 갔을 때 주저앉아서 잠깐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서 한참을 충동과 싸웠던 것 같다. 부엌칼로 손목을 끊어질 때까지 내리치고 싶은 기분에 스스로도 놀랐다. 하지만 그래봤자 피가 응고되니까 소용없지,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그만두고, 베란다 창문을 열까도 생각했다. 3층밖에 안 되니 소용없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내가, 만약 고층빌딩에 살고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그때도 망설였을까.
아무튼 찌질하고 용기 없는 생각을 정말 오래 하다가, 결국은 한쪽 눈이 떠지지 않을 때까지 울다 어느새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화요일에는 술병이 나 하루 종일 빌빌거렸다.
그다음 날인 수요일 오늘은, 반쪽 일일대여를 하기로 했었던 날이다. 우리는 맛있는 것도 먹기로 했었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화요일 저녁, 7시부터 침대에 누워 계속 고민했더랬다.


미칠 것 같이 보고 싶다. 그런데 늘 이런 식이다. 그를 만나서 웃고, 떠들고. 그를 보내고. 그러고 나서 홀로 집에 오면 나 자신이 점점 망가지는 걸 느끼고 만다.


새벽 한 시에 침대에 앉아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내가 그런 충동을 느낀다는 게 아니었다.


늘 이런 충동을 느끼지만 언제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국 잠들고, 살아내고 만다.
전에는 이런 내가 치졸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 날 정말 무서웠던 것은, 그렇게 한참을 스스로를 설득하다가 핑계를 대다가를 반복하다가, '계속 심해지니까 다음에는 곧바로 실행이 되겠지'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점이다.


나날이 심해지는 충동과 망상. 술을 마시면 심해지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혼자 있으면 술을 마신다.


분명 이번에 만나도 마찬가지겠지. 엄청 즐겁고 행복하게 함께 있다가 그는 돌아갈 테고, 나는 남겨진 채 그 뒤에 올 어둠이 너무나 무섭다. 너무나.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먼저 그냥 보지 말자고 카톡을 보냈다. 그는 '왜??'라고 물어봤고 나는 술병이 났다며 핑계를 댔다. 그는 몸이 아프다고 하면 두말 않는다. 오히려 그러고 났더니 마음이 편했다. 그러면서, 결국 또 서운한 마음은 찾아온다.


너무나 다정하고 친절한 이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나라면 '푹 쉬어'로 끝내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일일대여를 해 달라고 떼쓰던 이가 갑자기 돌변하면 걱정이 돼서 더 보려고 할 텐데.


아무튼 그렇게 수요일이 되었고 비가 오는 날이라 김치전에 맥주를 먹고 있으니 8시쯤 전화가 왔다. 3학년에 심각한 일이 많아서 지금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일상 얘기를 했다.


그는 생일선물로 뭘 받고 싶냐며 자꾸 물어봤다. 아무리 비싸도 괜찮다면서. 내가 '당신'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건 못 주니까, 라며 넘겨 버린다. 가장 받고 싶은 건 주지 않는 사람.


이젠 당신이 아니라 신이 존재해서 나에게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


원하는 게 뭐냐고. 제발 좀 날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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