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날들

5부 EP04. 프로작의 효과와 반복되는 일상들

by 에스

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이다.


프로작의 효과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 있지 않으면 기분은 보통이나 보통보다 조금 높게 유지되었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냥 '힘들다'일뿐, 자살충동까지 가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자 퇴사 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이 한 둘 떠올랐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에게 연락을 했는데, 너무나 반갑게 전화를 받아 주었다. 몇 명에게는 내가 쓴 책을 선물했고, 그중 몇몇은 제주도에 놀러 온 김에 나를 보고 가기도 했다. 반가운 얼굴들. 아직까지도 그 힘겨운 곳에서 웃으며 일하는 존경스러운 분들.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 또한 이제는 다른 길이지만, 여기서 나의 길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에 네 번 근무하는 카페 오픈 업무는 이제 조금 적응이 된 듯했다. 루틴이 생겼고, 노하우도 나름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단골 고객들의 얼굴을 익히게 되어 가끔은 짧은 대화도 나누며 평화롭게 일을 했다. 의자에 앉을 수 없기 때문에 6시간 중 30분의 휴게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긴 하지만, 며칠 전 종아리 마사지 기기를 중고로 산 덕분에 훨씬 상황이 좋아졌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점심에 퇴근을 하면 일단 마사지 기기에 다리를 넣고 좀 쉬었다가, 대충 밥을 먹고 공방으로 출근하고, 의 반복적인 생활. 그 와중에 날이 너무 좋다 싶으면 잠깐 근처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하고. 뭔가에 매어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이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꽤나 만족스럽다. 돈은, 그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마음 편히 먹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고 힘들 때마다 나 자신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크고 작은 사건들도 물론 종종 있다. 얼마 전에는 강과 헤어지려고 했었다. 술에 취한 강이 술김에 아이 얘기를 하는 걸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아이에 대해서는 둘 다 시간을 가지고 먼 훗날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으나, 이렇게 취중진담으로 아이가 가지고 싶은 그의 마음을 듣고 말자 심장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놓아줘야 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강이 원하는 단란한 가족을 이루도록 보내줘야 해.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 주정일뿐이고, 어디까지나 나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그러나 나는 죄책감 속에서 평생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진지하게 제시하자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자신이 꿈꾸는 단란한 가족 속에 물론 아이도 있으면 좋다고. 그러나 없더라도 자신은 나와 함께하는 단란한 가족을 원하는 거지, 내가 없는 가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는 울고, 화내며 긴 시간을 논쟁 같은 대화를 나눈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 더 이상 내 앞에서 아이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말기. 대신 나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열어 두기. 우리 모두 그 조건에 동의했고, 다음 날 이 대화는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우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최와 함께 공방으로 가서 일을 하고 있으니 그의 여자친구인 Y가 놀러 왔다. 나는 그녀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녀 또한 최를 만나기 전에는 비혼이나 딩크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를 만나고 난 뒤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며 너무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보육원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해왔다. 특정 아이를 후원하면서 자라는 모습을 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보며 아이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덜어내 보라는 것이다. 나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에 놀랍고 고마웠다. 나중에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드높은 벽도, 노력해도 잡히지 않는 부의 길도 모든 게 머나멀다. 그래도 일단, 오늘을 살아냈다는 것에 감사하자. 감사합니다.


엽서5사인.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문장에도 주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