펍에서의 마지막 근무일이 되었다.
평소처럼 메이크업을 하고, 뻑뻑한 하드렌즈를 끼고, 검정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길이 왠지 어색했다. 매장에 들어서니 매니저 동생과 바텐더 오빠, 직원 동생이 평소와 다름없이 반갑게 인사를 해 주었다. 나도 평소처럼 앞치마를 입고 검정 라텍스 장갑을 끼고 무전기를 착용했다.
일요일 제주 서쪽의 외진 펍은 한가로웠다. 우리는 매장을 정리하고 더 이상 할 게 없으면 다트 게임도 하며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2시. L은 조금 더 일찍 마감을 하고 회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마감을 하고, 나는 주방에 올라가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불을 껐다. 텅 빈 캄캄한 주방. 그 순간 매장에서는 바텐더 오빠가 고른 '너의 이름은' ost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노래를 들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쉽고 미안하고 고맙고 후련하고 섭섭하고 시원한
그 모든 기분들이 뒤섞여서 눈물을 만들어내다니.
우리는 송별파티로 늘 가던 냉삼겹집에 갔다. 오늘은 냉삼겹이 아닌 차돌박이를 시켜 김치와 함께 구워 먹었다. L은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 역시 거둬줘서 고마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식당 사장님과 함께 새벽 4시까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별의별 수다를 다 떨었다. 옛날 노래를 듣고, 그 가수에 대해 얘기하고, 본인들이 알고 있는 온갖 잡지식에 대해 알려주고.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그들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바로 앞 애월항구에 오도카니 앉아 바람을 쐬었다. 4월의 밤바다는 아직 포근하지 않았다. 그래도, 옛날 눈 쌓인 정동진에서 느꼈던 것 같은 자살충동은 들지 않았다. 발 밑은 온통 검은 바닷물로 출렁였다. 분명 평소 같으면 당장 뛰어들고 싶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직원 동생이 어디 있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오들오들 떨다가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정말.
다음 날. 나는 일찍 일어나 마지막으로 방에 남겨 두었던 짐을 쌌다. 낑낑거리며 모든 짐을 흙먼지가 가득한 아반떼 안에 쑤셔 넣고 제주시로 출발했다.
쉬는 날마다 틈틈이 부동산 발품을 팔면서 찾아낸 내 집은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4층짜리 원룸이다. 지역 간 인구 편차가 너무나 심한 제주도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주시 연동 쪽은 도로 양쪽으로 빼곡히 주차한 자동차들로 가득했고, 내 아반떼가 놓일 자리는 전혀 없었다. 나는 연동에 있는 매물을 하나 보고는 곧바로 연동에서 발을 뗐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바로 이 노형동인데, 집 컨디션부터 주변 인프라, 집세까지 모든 게 내 조건에 들어맞았다. 나는 집을 볼 때 아래의 조건들을 만족하는지 체크한다.
-보증금과 연세가 합리적인가?(제주는 보통 월세 열두 달 치를 한꺼번에 연세로 지불한다)
-주방 분리형 구조인가?
-창문이 커서 채광이 잘 되는가?
-베란다가 있는가?
-층수는 높은 편인가?
-샤워기 수압은 센가?(긴 머리 여자의 고충)
-옵션은 잘 갖추어져 있는가?(에어컨,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옷장이 있는가?(옷장이 없다면 수납공간이 매우 부족해진다)
-주차 공간이 있는가?
-주변에 편의점 등 편의시설이 있는가?
-(가산점) 주변에 공원이 있는가?
내가 고른 집은 위의 모든 조건을 만족할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도서관까지 있다. 그리고 번화가와 가깝지만 주거 지역이라 밤에 조용하다. 신이 날 도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원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꼭대기 층이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반나절 만에 짐정리를 끝냈다. 이제부터는 제주 시내에서의 제주살이가 시작된다. 어떤 일이 생길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