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공기가 맑고 푸르렀지만 단 하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보려면 두 시간 정도 운전해서 가야 하는 태안이 그나마 가장 가까웠다. 너무 힘들던 날, 충동적으로 혼자 2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태안 바다를 본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고, 내게 바다가 얼마나 필요한 지 깨닫게 되었다.
시인 허연의 <조개무덤>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에 담긴 의미는 전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지막이 써진 그 글귀들을 정말로 많이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살고 싶을 때 바다에 갔고
죽고 싶을 때도 바다에 갔다
사라질세라 바다를 가방에 담아왔지만
돌아와 가방을 열면
언제나 바다는 없었다"
죽고 싶어질 때면 바다에 가고 싶다. 그 깊고 푸른 파랑을 보면 견딜 수 없는 우울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다. 술을 한 잔 하고 포구에 걸터앉아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바다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 넘실대는 모습을 보면 가시 돋친 마음이 치유를 받게 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파란색은 양면적인 안식처인 것 같다.
제주로 온 뒤, 단 20분만 걸으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제주의 바다는 어디든 안 예쁘겠냐만은, 개인적으로 세 곳을 가장 좋아한다.
첫 번째 바다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호테우라는 동네다. 낮에는 빨간 말등대와 하얀 말등대가 파란 바다를 배경 삼아 우뚝 서 있고, 밤에는 은은한 야경과 수평선을 수놓은 한치배의 불빛이 낭만의 절정을 보여 주는 곳이다.
이호동으로 이사 온 후 나와 강은 날 좋은 밤이면 캠핑의자와 테이블을 싸들고 말등대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검은 바다 위에서 아른거리는 불빛을 감상한다. 가끔은 사람들을 모아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끄적이기도 하며 감성에 빠지기도 한다. 가끔씩 우울한 날에는 혼자 느적느적 걸어와서는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 먹으며 방파제를 거닐기도 하면서.
두 번째 바다는 협재 해수욕장이다. 처음 제주살이 때 협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참 많이 본 바다이다. 협재 바다 색깔은 단연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아이보리색의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닷물의 조합은 여기가 어디인지 잊을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물에 담근 발이 투명하게 내려다보이는 맑은 바닷물과 생생한 초록빛깔의 해초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비양도까지 그야말로 완벽하다. 제주시로 넘어오기 전까지 불면증이 심할 때면 협재 바다를 자주 걷곤 했다.
마지막 바다는 동쪽의 김녕. 며칠 전 주말에는 김녕해수욕장에서 그림 모임 사람들과 물놀이를 했다. 올해 들어 김녕에서만 두 번이나 물놀이를 했다. 김녕도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이지만, 뭔가 협재보다 좀 더 여성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파도는 잔잔해서 바닥에는 흰모래가 일렁이며 반짝이고, 수심이 얕아 아이들은 신나게 물장구를 친다. 저 멀리 깊은 바다에서는 보트가 내달리고, 더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는 커다랗고 하얀 풍력발전기가 천천히 돌아간다. 여유롭고 평화롭다. 우리는 스노클링 장비를 쓰고 바닷물에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며 김녕의 여유를 즐겼다.
오늘은 그림 모임 친구 한 명과 함께 김녕에 다시 왔다. 카페 안에서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근 한 달을 글을 쓰지 않았다. 그간 별다른 사건사고나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서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오히려 불행이 아니라 다행으로 느껴진다. 디자인 업무는 조금씩이지만 수입이 늘고 있고, 먹는 약도 양을 조금 줄이게 되었다. 메리드블루는 상견례 이후로 사라져서 강과 같이 있으면 너무나 편안하고 안정감이 든다. 바다가 예전보다 더 좋아졌지만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술을 먹고 난 뒤 죽고 싶어서 찾는 바다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며 하나하나 목표를 정해나가면서 쉬어갈 때 찾는 바다가 된 느낌이다. 나중에, 언젠가는 제주에 땅을 사서 2층짜리 건물을 짓고 싶다. 1층은 강의 식당과 나의 카페, 2층은 우리의 집으로. 넓은 마당에서는 불멍도 하고 바비큐파티도 하고, 고양이들은 뛰어놀고.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꿈을 꿔 본다.
딱 지금처럼만. 디자인 업무가 지금보다 조금만 많아지고, 이것저것 하고 있는 취미활동들도 조금 더 발전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좋은 추억을 쌓기를. 매일 꾸는 생생한 악몽의 내용이 조금만 부드러워지기를. 내일 출근할 카페에서 손님들이 쉬운 메뉴만 주문해 주기를. 작은 목표들이 하나하나 생기기를. 소소한 행복과 소소한 걱정들로 일상이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