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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 Sep 29. 2024

오늘은 죽고 싶은 날

4부 EP11. 파도에게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살 욕구가 생기지만, 그 정도는 날마다 다르다.


   특별히 간절할 정도로 죽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공방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운전하는 길이 배고팠다. 출근 전에 우유에 시리얼 조금만 먹은 탓이었다. 집에 가면서 늘 그랬듯이 엄마에게 문안 전화를 했다. 월, 화, 수요일 오전에 일을 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다른 지점에서 목, 금요일 알바를 구한다고 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그렇게 되면 너무 일이 많은 게 아니냐고 걱정하셨지만, 나는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은 마음이었다. 면접을 보는 곳 역시 오전 오픈 업무라서 공방이나 디자인 업무에 지장을 주지도 않았다. 손목도 거의 다 나았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며 엄마를 안심시키는 입이 썼다.

   

   집에 도착함과 거의 동시에 B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흘, 나흘에 한 번씩 잘 정도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B는 아직 점심을 안 먹었다고 해서 동네 회전초밥에서 만났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느릿느릿 각자 5~6 접시 정도의 초밥을 먹었다. 그는 내가 일전에 부탁한 업무용 키보드를 박스채 들고 와서 건네주었다. 집에서도 작업을 하려고 노트북 받침대를 샀는데, 그렇게 했더니 자판을 두드리기가 너무 불편하다고 했더니 그가 선뜻 남아도는 키보드 하나를 주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밥을 먹고 바로 옆 카페에서 오래간만에 작업을 하지 않고 담소를 나누었다. 담소라기보다는 업무 이야기가 90퍼센트였지만. 우리는 전에 나와 그림 전시를 했던 대학생 최와 함께 셋이서 디자인 회사를 차리기로 한 참이었다. 몇 주 동안 고민한 끝에 업체명을 정하고, B가 사업자를 내고, 이제 홈페이지 정비와 회사소개서 등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온라인 쇼핑몰도 준비했는데, 쇼핑몰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어 다음 주 월요일에 오픈 예정이다. 이 모든 것에는 B의 손길이 들어가 있는데, 그가 10여 년의 디자인 일을 하는 동안 이 쪽 방면에 대해서는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회사소개서라는 걸 써본 적이 없고, 홈페이지도 애들 장난처럼 뚝딱거릴 줄만 알았으니. 최 역시 대학생으로 생활하는 동안 돈을 벌어본 경험은 짤막짤막한 알바들 뿐, 뭔가에 자신의 인생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B의 업무량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나는 그나마 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넘기라고 얘기를 했지만 B의 성격상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일 것이 뻔했다. 디자인 회사 설립, 쇼핑몰 개시, 그리고 개인 프리랜서 작업까지.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만도 한데 그는 매일 밤을 새웠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일 생각이 끊임없이 나면서 불안에 시달린다고 한다. 나는 정신과를 꺼려하는 그를 위해 신경과를 추천해 보았지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겨우겨우 그를 설득해서 11월까지 유예기간을 주고 그때까지도 불면이 심하면 같이 신경과에 가기로 약속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7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B와 헤어져 집으로 와 주차를 하고는 바다를 보러 갈 준비를 했다.

   이사한 집 역시 20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있었다. 이호테우만큼 산책로나 휴식 공간이 갖춰진 곳은 아니지만, 나무로 만든 작은 정자 두 개와 길게 바다로 뻗은 방파제는 충분한 힐링 코스가 되었다. 걷는 도중에 편의점에 들러서 세계 맥주 네 캔을 샀다.

   태풍이 올 거라는 뉴스가 틀리지 않았나 보다. 바닷가로 갈수록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서 드디어 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더위가 가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러 나왔으리라. 나는 사람들을 피해 방파제의 끝까지 걸어서 난간이 없는 현무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얼굴에 소금물을 뿌려댔다. 사 온 맥주를 따서 홀짝거리자 배가 살살 아파왔다. 어제 혼술로 양주를 먹고 잤더니, 하루 종일 설사를 했다. 양주는 역시 나랑 안 맞아…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모금. 역시 맥주가 옳다.

   파도 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며 크게 부서지는 모습을 영원히 담고 싶어서 동영상으로 녹화를 했는데, 조명이 없는 밤바다라서 화질이 영 엉망이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눈에 담아야겠다.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듣다가, 다시 눈을 뜨고 검게 출렁이는 사나운 바다를 응시했다. 이런 날 물에 빠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파도는 거셌다.


   오늘은 정말이지 죽고 싶은 날이었다. 당장이라도 파도에 뛰어들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죽는다면 그제야 모든 것을 다 이룬 기분일 것 같았다. 말없이 옆에서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있는 강은 수영을 잘하는 편이지만, 이런 바다에 누가 빠진다면 발만 동동 구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거의 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다시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었다. 바다는 늘 옆에 있다. 파도가 사나운 날도 앞으로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예전 겨울 정동진의 눈 덮인 바다를 보았을 때 든 기분과 비슷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오늘보다 더 처참하면, 오늘보다 더 추락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한라산 등반 예약을 하려고 핸드폰을 켰으나, 예약기간이 아니었다. 나는 예약 일자에 맞게 알람을 맞추었다. 차갑고 험한 겨울의 한라산에 오를 것이다. 언젠가는 꼭, 겨울에, 눈 속에서, 눈 덮인 바다 속에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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