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03
6월 X일
우리 과의 남학생 D가 새 자취방으로 이사를 해서 집들이 초대를 했다. 그는 여학생들과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었는데 용기를 낸 건지 몇 명의 여자아이들을 집들이에 초대해 주었다. 나 역시 그와 말을 나눠본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친분은 딱히 없었는데, 다른 친구들도 간다고 하길래 얼떨결에 나도 간다고 했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D를 앞장세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수업이 꽤 늦게 끝난 탓에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나는 이런 늦은 시간에, 아니 애초에 남자 사람의 자취방을 놀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대학가의 원룸들이 그렇듯이, D가 이사했다는 원룸 역시 낡디 낡은 4층짜리 건물이었다. 낡은 외관과는 달리 의외로 깔끔하고 널찍한 한 칸짜리 원룸방에 남학생 몇 명과 함께 어색하게 원을 만들어 앉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너무나 조용하고 말주변이 없는 여자아이였다. 무려 여중, 여고를 나오기도 했거니와, 거기를 거치는 동안 겪은 질풍노도의 사건들 탓에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었다. 다행히 남자 애들이랑 잘 이야기하는 밝고 쾌활한 친구 한 명 덕분에 분위기가 완전히 침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거의 삼십 분 가까이 어색한 대화는 뜨문뜨문 이어졌다. 빗방울이 눈에 보일 만큼 떨어지기 시작해서야 다른 여자아이 한 명에게서 거의 다 와간다는 연락이 왔다.
바깥은 완전한 어둠이 내려 가로등 등불이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인 우산 하나를 쓰고 친구를 데리러 나갔더니, 친구는 그 사람과 같이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늦게 왔다며 성질을 부렸다.
“왜 이렇게 늦어요? 주인공이야?”
“나는 항상 주인공이지!”
그는 늘 그랬듯이,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다 웃으며 받아준다. 그리고는 우리를 앞서서 밤거리를 유쾌하게 걸어갔다. 우산도 없이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두 팔을 벌리고 아주 즐겁게.
그때 그가 메고 있던 갈색 가방의 끈과, 불빛이 번져서 붉고 파랗게 빛나던 캄캄한 밤의 풍경, 핸드폰으로 찍어 놓은 뒷모습이 아련하다.
그때,
나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만인이 좋아할 만한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6월 10일
중간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대학교 시험공부에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대학교에서는 이게 무엇이고, 이건 어떻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설명 대신, 교수님들은 대개 이런 표현을 쓰셨다.
“자, 이 부분은 과제입니다. 다음 주까지 이것에 대해 A4 3장 분량으로 조사해 오세요.”
혹은,
"글씨 크기 키우거나 줄 간격 조절하지 마세요. 다 티 납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면 거의 고등학생처럼 열심히 시험공부를 했다. 나는 사범대학교 미술 전공이었고, 시험공부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미술의 역사였다. 나는 애초에 역사에는 젬병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통틀어 수학보다도 싫어하는 것이 역사였는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연도별로 무슨 사건이 일어났고, 누가 태어났는지, 누가 혁명을 일으켰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런데 무려 서양 미술의 역사라니. 끔찍했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나는 야수파가 뭔지, 언제 활동했는지조차 모른다.
그날 밤, 우리가 어떻게 서로 얘기를 시작한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같이 원거리 밤샘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기숙사 휴게소에서, 그 사람은 아마도 도서관이나 집에서 일 것이다.
[ㅇㅇ아, ㅇㅇ아!! ^^]
[오빠 왜요?]
[혹시 포비즘 정리해 놓은 거 있으면 공유 좀 해주라! ^/^]
[자료는 오빠가 더 많지 않아요?]
[나 아무것도 몰라! 맨날 졸아서…]
[으이구]
우리는 필요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며 새벽까지 틈틈이 문자를 했다. 의외로 눈치가 빨랐던 나는, 그가 나에게 연락하는 것이 시험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적인 목적이라는 것조차 알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하는 공부라 체력은 남아나지 않고, 머리는 아프고, 동시에 마음도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기숙사 휴게소 소파에 누워 창밖이 조금씩 짙은 푸른색으로 밝아오는 것을 보며, 그 사람과 함께 깨어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기뻤다.
그리고 시험은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