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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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기나긴 방학이 되었다. 대학생이 끝내주게 좋다는 건 방학이 오자 깨닫게 되었다.
7월도 되지 않았는데 무려 방학이라니! 방학이 두 달이라니!!! 두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다니!!!!
부모님 돈으로 학교 다니는 주제에, 학교를 안 간다고 좋아하는 건 뭔가 죄송하지만 아무튼, 합법적으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정말이지 짜릿한 일임에 틀림없다.
한편, 우리 학교 기숙사는 방학에 학생들이 칩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기숙사생들은 방학 전날까지 짐을 바리바리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 역시 기숙사 룸메이트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몇 안 되는 허접한 옷가지와 컴퓨터 본체 같은 것들을 꽁꽁 싸매서 택배로 부쳤다.
한 달이 넘는 긴 방학 동안, 알바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뒹굴면서 심심할 때마다 틈틈이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왕따를 당할 때도, 누군가를 좋아했을 때도, 엄마와 아빠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싸울 때도. 중, 고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그려오던 그림에서는 어째서인지 전부 똑같이 생겨 있었다. 긴 앞머리에 뒷목까지 오는 빨간 머리칼, 뿔테 안경과 쌍꺼풀 없이 날렵한 이목구비. 호리호리한 몸매와 펑키한 옷차림. 아무리 다르게 그리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는 점이었다.
그런데 오늘 엄마가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보더니,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말을 거셨다.
“어? 우리 딸 맨날 똑같은 사람만 그리더니, 오늘은 다른 사람이네? “
“진짜? 그래 보여?”
”응. 다른데? 누구야? 좋아하는 사람?”
기뻤다.
6월 28일
방학은 계속 흘러간다.
친구가 없는 나. 휴대폰은 자주 울리지 않았다. 부질없는 스팸 문자들이 몇 통 오고 나서 마지막으로 또 누군가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번에도 쓸데없는 거면 화가 날지도 몰라'하며 확인을 했더니 그 사람이었다.
[ㅇㅇ아~ 잘 있어? 어떻게 오빠한테 연락 한통 없어?]
[오빠야말로 연락 안 했잖아요.]
[지금 하잖아! 잘 지냈어? 난 네가 방학을 미치도록 재밌게 보내고 있을 거라 믿고 있어!!]
방학은 미치도록 재미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지럽게 쌩쌩 돌던 지구가 갑자기 속도를 늦춘 것 같았다.
그는 밴드 ‘넬’이 내년에나 컴백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검색해 보니 정말이어서 조금 슬펐다.
가벼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와 나는 공통 관심사가 꽤 많았다. 일단 밴드 음악을 좋아하고, ‘넬‘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같이 콘서트를 가자며 약속했는데, 당최 컴백을 하지 않으니 기회가 없다.
그리고는 만화책 얘기를 했다. 우리는 만화책 취향도 잘 맞았다. 그는 나보다 한층 더 고수인 듯, 이것저것 내 취향에 맞을 법한 작품을 추천해 주었었다.
[몬스터 봐봐. 20세기 소년 작가가 그린 몬스터. 그거 대박이야]
[오, 저장. 오빠가 추천해 준 만화는 전부다 최고였음]
[아 진짜?ㅋㅋㅋㅋㅋㅋㅋ 뿌듯한데? 방학 동안 만화책 더 많이 사다 놔!]
[네]
보고 싶다. 그는 서울에 살고 있어서 부산에 살고 있는 나와는 거의 극과 극으로 떨어져 있다. 한 번 놀러 온다면 좋을 텐데. 어느덧 나의 연습장은 모두 그의 그림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보고 그릴 만한 사진이 별로 없어서 슬프다.
7월 X일
가끔씩 있는 그 사람과의 통화는, 기억해 보면 항상 정말 슬프고 우울한 날에만 전화가 왔던 것 같다.
분명 나는 통화 중에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짤막하고 시답잖은 별 거 아닌 대화로 인해 늘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참 고마워요.
7월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절대로 그 옆에는 내가 설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어쩐 이유에선지 동시에 깨달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밝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인데,
나는 어둡고… 같이 있는 사람을 같이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그 사람의 여자가 되기에는 부족할 뿐이다.
8월 X일
그날, 누가 어떻게 전화를 하게 된 건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당연히) 그가 먼저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는 쓸데없는 얘기들을 늘어놓다가 나중엔 우리 과의 E 언니와 사귄다는 얘기를 해주며 멋쩍게 웃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 그런. 눈앞이 하얘지는.
하지만 방학 전 보았던 둘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짐작했었고, 기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사람 못지않게 밝고 착한 언니. 축하해요.
8월 26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어떤 대화가 생각이 났다. 일전에 친구와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서로의 소망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친구는 내 소망을 듣고는 '별로 어려운 소망도 아니네'라고 했었다.
그치만 그건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내겐.
그래서 조금 슬퍼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