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내가 문제다
K실에서 2년을 보내고 나니 어느덧 2015년 초가 되었고, 두 번째 부서이동 시즌이 다가왔다. 지난 2년간 K실에서 본인이 원하는 부서로 옮겨간 사례를 꽤나 볼 수 있었기에 지역 사무소로 갈 거라는 걱정은 거의 없었고, 당연히 나도 그들처럼 핵심 부서로 갈 것이라 생각하며 굉장히 과감한 인사이동 희망서를 제출했다.
공기업 직원들은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일 없이 그 곳에서 퇴직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며, 그렇기에 가급적 좋은 부서를 많이 다니면서 업무 경험을 쌓고 인맥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과거에 어느 부서에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일종의 훈장이자 증명서가 되는 것이다. 사기업을 다니는 분들이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아 몸값을 올려 이직하는 것과 비슷한 컨셉이라고 보시면 된다.
이 회사의 인사이동 시스템은 꽤나 특이한데, 공식적인 희망서와는 별도로 본인을 희망 부서에 세일즈 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인 절차다. 예를 들어 내가 S라는 부서에 전입하고 싶다면 해당 부서의 지인에게 전화해서 '이번 인사에 조사역 (혹은 과장) 몇 자리나 빌 것 같으냐, 가고 싶은 기회 되면 말 좀 해달라'라고 읍소하는 식이다. 현재 있는 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 담당 팀장이나 차/과장 등이 직접 해당 부서에 추천 전화를 걸어 주기도 하며, 아무래도 이럴 경우 좋은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부서에서는 이런 식으로 모인 전입 희망 및 추천을 잘 조합하여 부서에서 받고 싶은 직원들의 리스트를 인사 부서에 제출하고, 인사 부서는 전체 회사의 인력 구성 및 개개인의 이동 희망 등을 고려하여 최종 인사 발표를 하게 된다.
그 당시 나는 5년차에 들어서는 고참급 조사역이었다. 하지만 2013년에는 부서 이동을 생각도 안하다가 뒤통수를 맞았기에 이번이 사실상 첫 부서이동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이 작업은 타이밍이 생명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세일즈에 가장 중요한 첫 이틀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버린 것이다. 같이 일하는 B 차장이 '전입 전화 잘 돌리고 있지?'라고 물었을 때야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전화기를 들었지만, 이미 내 1지망 부서에서는 전입 관련 프로세스가 종료된 뒤였다.
5년차가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내 과실로 다 차린 밥상을 엎어버린 격이었으니 부끄러워서 어디다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2년 전 부서이동이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는 내 잘못이 아닌가?
선배 J의 냉정한 조언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J는 직설적이고 쿨한 성격이었지만 의외로 나와 죽이 잘 맞았다. 그와는 종종 밥도 같이 먹었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궁금한 것이 있다면 자주 조언도 구했다.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후배의 말에 회사 뒤 주차장으로 나온 그는 전후 사정을 모두 듣더니 이미 1지망 부서는 가능성이 없다며 Plan B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고, 몇 년 내에 해외 유학을 생각하는 내 사정을 고려해 볼 때 A국이 가장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간 고생해서 겨우 얻어 낸 1등석 티켓을 내 손으로 찢어버렸다는 자괴감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조언이 가장 현실적이었기에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A국에 전화를 걸었다.
"음... 우리도 거의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한번 해 볼게. 너 통계 프로그램은 좀 쓰냐?"
"아뇨... 제가 있던 부서들이 다 실무부서라..."
"우리 부서 오면 대부분 통계 프로그램 많이 써야 하는데... 알았어. 그럼 조사연구해 본 적은 없는 거지?"
"... 네..."
다행히 그곳에도 나름 가깝게 지내는 H 차장이 있었고,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기에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질문이 이어질수록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연차 직원이라면 모를까, 나름 회사 짬밥이 쌓인 조사역은 즉시 전력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 근무한 부서에서 이런 걸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내 잘못이라고만 하기는 어렵지만, 인력을 받는 A국 입장에서 그런 걸 신경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런 나를 세일즈해야 하는 H 차장에 대한 미안함은 커져 갔고, 전화를 끊은 이후 '내 주제에 Plan B는 무슨?'이라는 생각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