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말고는 우리 가족의 여행 스타일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2017년부터 학교를 졸업한 2019년까지의 약 2년간은 말 그대로 약간의 여유만 생기면 비행기를 타거나 차를 몰고 미국 곳곳의 유명 관광 명소들을 돌아보곤 했다. 나와 아이의 학교 일정의 빈 틈에만 여행을 떠날 수 있었기에 여행 계획은 언제나 타이트했고, 마치 퀘스트를 하는 모험가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요 포인트를 들러 사진을 찍고 감상한 뒤 다른 명소로 이동하는 스케줄을 밤까지 이어갔다. 2주일도 안 되는 봄방학 동안 떠난 첫 로드 트립 때는 텍사스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왕복 4천 km에 달하는 거리를 달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여행이 이런 식이었으니 막판에는 다들 몸살이 나서 골골대며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언제부턴가 나도 와이프도 슬슬 질려가기 시작했다. 가봐야 할 곳들은 어지간히 다녀오기도 했고, 새로운 풍광을 눈에 담았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감탄도 슬슬 무뎌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세 가족이 즐거우려고 하는 여행인데 느릿한 호흡으로 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올해 초 내내 비자 문제로 속을 썩이면서 내 속은 스트레스로 곪아가기 시작했고, 일에도 가정생활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당장 몇 달 후에 짐 싸서 영구 귀국을 해야 할 수도 있는 판국에 내 앞에 놓여 있는 문서 작업이나 고객과의 회의가 뭐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겠는가? 이러다가 병나겠다 싶어 좀 이른 5월의 여름휴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남든 아니면 한국에 가든 이때 여행 다녀오는 건 문제가 없을 테니까. 호텔을 알아보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동선을 짜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쌓여있는 더께가 조금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플로리다는 2018년 11월에 어머니와 동생을 동반하고 다녀왔던 곳이다. 그때도 열흘이 안 되는 짧은 여행기간 동안 마이애미-키웨스트-탬파-올랜도를 거치는 플로리다 일주를 계획했었기에 각 도시에서는 보통 하루, 길어야 이틀 정도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탬파는 올랜도 가기 전 하루 쉬어가는 도시에 불과했는데, 그곳에서 차로 30분만 가면 클리어워터 (Clearwater)는 바닷가가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고 해서 억지로 아침 시간을 쪼갰었다. 바닷가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여행을 이딴 식으로 계획한 나의 머리통을 한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맙소사.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두고 떠나야 한다니. 다음 스케줄 때문에 고작 30분밖에 머물 수 없었지만, '죽기 전에 꼭 다시 한번 오리라'라고 다짐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2021년 5월 8일 늦은 점심 즈음 클리어워터의 호텔에 도착했다. 고작 3년 만에 다시 올 수 있게 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오후 4시경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밀가루처럼 보일 정도로 부드럽고 하얀 모래사장에 잔잔한 옥빛 바다,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까지. 비행과 운전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5월 초인데도 바닷물은 충분히 따뜻했고, 피서객들도 많지 않아 여유 있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엔 커다란 야생 돌고래 두 마리가 얕은 바닷가를 노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휴가를 기다리며 와이프에게 말하던 '아무 생각 안 하고 따뜻한 바닷물에 몸 담그다 오면 바랄 게 없겠다'가 현실이 되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차를 한 시간 타고 남쪽의 새러소타 (Sarasota)라는 도시의 바닷가를 들렀다. 식당이나 즐길 거리는 조금 부족했지만 바닷물은 훨씬 따뜻했으며,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조개껍질을 주워 모을 수도 있었다. 클리어워터 못지않게 좋은 기억이 남은 해변이었다.
미국 프로야구 Tampa Bay Rays의 홈구장인 트로피카나 필드 (Tropicana Field)에서 New York Yankees와의 경기를 관람했다. Covid로 인해 입장객 수를 제한했기에 야구장은 굉장히 한산했고, 식당이나 기념품점의 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국 선수인 최지만의 얼굴이 팀의 대표 선수들과 함께 걸려있는 건 상당히 인상 깊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부상으로 인해 그날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 야구장의 명물인 가오리 만져보기 행사도 그날따라 열리지 않았다. 태민이랑 같이 먹이도 주고 가오리도 만져보고 싶었는데...
올랜도는 디즈니월드를 비롯해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테마파크들이 모여있는 도시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디즈니월드 방문을 위해 이곳을 찾지만, 우리는 이전에 디즈니에 가본 적이 있어 이번에는 레고랜드 (Lego Land Florida)에 가기로 했다. 공원 곳곳의 개성 넘치는 레고 조형물들을 감상하며 놀이기구를 타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사실 아이도 아이지만 와이프가 더 즐거워했던 것 같다.
여행의 마지막은 플로리다 동쪽의 작은 도시인 생 어거스틴 (St. Augustine)이다. 이 곳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1500년대 후반에 건설한 유서 깊은 도시이며, 아름다운 바다 옆의 수백 년 된 요새는 아직도 굳건히 서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지 거리 곳곳의 건물들은 미국 도시보다는 오히려 멕시코나 남미 도시에 더 가까운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느긋하게 보낸 일주일이었다. 하루를 통째로 숙소에서 쉬면서 보내기도 하고, 하루 종일 수영만 하기도 했다. 어딘가 들르고 구경하며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여유 있게 보낸 이 시간. 올 한 해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때의 기억이 위로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