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공연날

by Sol Kim

드디어 2004년 10월 18일 오후 7시, "세 개의 해트모자"의 막이 올랐다. 연극학교가 끝나자마자 공연을 위해 희곡 읽기와 모놀로그 등 밑작업을 진행했으니 이 순간을 위해 거의 두 달을 준비한 셈이다. 하지만 대본을 수정하고, 모자란 인력 충원을 위해 외부 인력을 데려오고, 작품 분석 중 나온 견해차를 수습하고 하느라 시간을 보낸 탓에 실제 연습기간은 한 달 남짓이었다. 생 초보였던 내가 제대로 된 연극배우가 되기엔 턱 없이 모자란 시간. 연출이나 주변 선배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질타를 받은 덕분에 그나마 목표했던 것 엇비슷하게라도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KakaoTalk_20230215_114548485.jpg 거의 20년 된 인쇄물 치고는 상태가 꽤 괜찮다



암전된 무대 위에 여관 주인 역의 여선배 K와 함께 올라가고 자리를 잡으니 조명이 켜졌다. 상당히 긴장된 상태였지만 실수 없이 계획대로 움직이고 대사를 주고받았다. 다 좋았는데 문제는 공연 초반의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인 디오시니오와 여관 주인인 Donna Rosa는 수십 년간 보아온 그야말로 모자 같은 사이기에 스스럼없이 그녀 앞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어야 했다. 공연 준비 내내 이 장면에 대해 논의하고 연습해 왔기에 주저 없이 바지를 벗고 윗옷을 벗어 속옷 차림이 되었다. 분명 골백번도 더 연습했던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관객석에서 '어우~'하는 민망함 반 조롱 반의 탄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집중이 깨지며 부끄러운 웃음이 올라왔다. 안되지 안돼. 나는 김솔이 아니라 디오니시오인데.


그 이후로는 어떻게 공연이 흘러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커튼콜을 하면서 다른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의 눈부신 조명 안에서 관객들에 고개 숙여 인사하던 그 순간의 뿌듯함과 성취감은 그동안의 노력과 눈물을 보상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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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오전, 둘째 날 공연을 준비하러 공연장에 온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Donna Rosa를 맡았던 선배 K가 조모상으로 인해 고향에 내려간 것. 공연이 고작 4-5시간 남은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관객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연출이 대본을 들고 선배 K의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금일 공연을 취소하느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후자를 지지했다. 팀의 일원이자 극의 중요한 부분인 K가 빠진 상황에서 공연을 진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한 명은 정말 격렬하게 이에 반대했다


"이 공연을 귀한 시간 내서 보러 올 관객들은? 어떻게 연극을 취소할 수가 있어! 당연히 진행해야 되는 거야!"


결국 다수결로 19일에 예정된 두 차례의 공연은 취소되었고, 그는 크게 좌절하여 열굴을 가리고 공연장에 드러누워버렸다. 그 당시에는 동료가 상을 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연극을 우선시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계획대로 공연을 진행하는 게 정답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K가 자기가 빠져도 공연은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전언을 남기기도 했고, 이런 식의 급작스런 취소는 극회를 신뢰하고 자기 시간을 쪼개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부도수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K가 가족의 양해를 구하고 20일에 다시 와서 공연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이 일이 일종의 화두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