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날에 던진 질문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1년을 꼽으라면 단연 2004년이다. 가장 바빴지만 동시에 가장 즐겁고 반짝반짝 빛나던 한 해이기도 하다. 원하는 곳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고, 테니스와 연극 동아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짬짬이 과외도 두어 개씩 하면서 용돈도 벌었다. 주말조차 교회 초등부 교사에 워십팀 활동까지 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주 7일 내내 쉴 틈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었기에 몸은 지칠지언정 마음은 언제나 즐거울 뿐이었다.
2004년 하반기의 어느 날, 오래간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걱정되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너 너무 바쁜 거 아니니? 그렇게 살다가 죽을까 봐 겁난다
그 때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웃어넘겼지만, 지금 와서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간다. 2004년 하반기에 집에서 저녁을 먹은 게 아마 다섯 번이 안되었을 테니까. 가을엔 테니스 치느라 바빴고, 추운 기운이 맴돌기 시작한 겨울에는 연달아 연극 '세 개의 해트 모자'와 뮤지컬 '연애권장법 대소동'을 준비하느라 학교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나마 연습이 없는 날이면 과외를 가느라 정신없었으니 집은 그야말로 잠자러 들르는 곳이었다.
S 대학은 정말 출중한 친구들이 널려 있는 곳이라 나보다 더 열심히 놀면서도 성적도 잘 받는 친구들이 꽤나 많았다. 반면 내 1학년 성적은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나마 1학기엔 3점대 중반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학점을 받을 수 있었지만, 2학기 몇몇 수업들은 도저히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특히 회계원리 수업이 그랬는데, 회계는 기초를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그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문이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에 바빠서 이전 수업 때 배운 내용을 소화하지 못하니 점점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 강의실에 앉아만 있지 배우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며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10월 중순의 회계원리 중간고사 날. 오전에 친구 S와 함께 커피숍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다가 "분개가 뭐야?"라고 질문하는 순간 그는 뒷목을 잡고 신음을 토했다. 분개 (journalizing)란 회계상의 거래를 입력 시 어떤 계정과목과 얼마의 금액을 기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절차인데, 이건 첫 수업시간에 배우는 기초 중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그의 입장에서 시험 당일날 이런 걸 물어보는 내가 얼마나 얼간이 같아 보였을지... 물론 그는 (씩씩거리면서도)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긴 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내용을 배우는 건 불가능했고, 당연히 낙제에 가까운 성적을 받아야 했다.
그 당시에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장학금을 받고 있던 나는 학기 초마다 지난 학기 성적표를 동봉한 장학 신청서를 학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했다. 그 일을 담당하던 나이 지긋한 교직원이 내 원서를 보더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장학금 받고 공부하면서 (성적이) 이 정도면 안되지!"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3점을 정말 아주 간신히 넘어선 2학기 성적표가 머리 속에 떠오르자 나는 비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