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가을 공연 "세 개의 해트 모자"
극회에 가입하고 한 달쯤 후 가을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99학번 C 선배가 연출을 맡았고 기획, 무대감독, 배우로 참가할 인원들을 확정해 나갔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뒤 공연에 참가하는 멤버들끼리 모여 여러 개의 대본을 읽었는데, 큰 이견 없이 "세 개의 해트 모자 (Tres sombreros de copa, 미겔 미우라 작)"라는 스페인 희곡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 희곡은 주인공 '디오니시오'가 결혼 전날 고향의 여관에서 유랑 극단의 무희 '빠울라'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디오니시오가 결혼식을 위해 준비한 세 개의 해트 모자는 '엄숙하고 진지한' 삶의 상징인데, 정작 그는 결혼식장에 빠울라가 공연에 쓰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간다. 이 마지막 장면은 디오니시오가 진짜로 원하는 삶과 행복은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씁쓸한 결론을 암시한다.
공연 대본도 정해졌으니 이제 배역을 정할 차례다. 대본의 한 부분을 골라서 배우들에게 주고 며칠 후 연출과 기획 앞에서 연기하는 식으로 오디션이 이루어졌다. 뒤에서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왜 저렇게 해석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실제로 첫 오디션이 어땠는지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애초에 신입 배우에게 중요 역할을 맡길 리가 없기에 부담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던 것 같다.
오디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연극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주연인 '디오니시오' 역할이라니? 깜짝 선물에 대한 기쁨보다는 '이게 맞나?'라는 놀라움이 훨씬 컸다. 연출 C는 '주인공의 순진한 이미지랑 네 이미지가 잘 맞는다'라고 설명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신입 단원에 대한 배려였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깜짝 선물은 다른 어려움을 가져왔다. 1학기에 경영대 테니스부 활동을 열심히 해서 2학기 총무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여기에 인문극회의 가을 공연이 끼어든 것이다. 테니스부의 2학기는 연중 최고 행사인 "경영대 학장배 전교 테니스대회"를 준비해야 해서 굉장히 바쁜데, 나는 연극과 테니스 둘 다 놓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단역이면 모를까 주연이 연극 연습을 빠질 수는 없었고, 결국 테니스대회를 얼마 안 남겨놓고 테니스부 총무 자리를 사임해야 했다. 다행히 동기 중 하나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별일 없이 일을 잘 마무리했지만, 이 일로 인해 테니스 동아리 선배들, 특히 2학기 회장이었던 L 선배와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몇 달간 동아리방에 들를 때마다 날 선 눈빛과 가시 돋친 말들이 날아왔고, 전적으로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비굴한 미소와 사과로 받아넘겼다. 먼저 승낙한 일에 책임을 다 해야 했는데 연극에 불붙은 내 욕심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힘들어졌으니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어쨌든 어렵게 테니스 동아리에서 직을 내려놓고 공연 준비에 매달렸다. 일주일 중 4~5일을 연습하는 강행군이었고, 연극 연습에 이어지는 뒤풀이까지 끝마치고 막차를 타면 새벽 12시 50분경 8호선 몽촌토성 역에 내려서 집까지 30분 이상을 꼬박 걸어가곤 했다. 그래 놓고 다음날 아침 9시 수업을 어떻게 들어갔는지, 이런 생활을 어떻게 2달 이상 유지했는지 그 당시의 체력과 열정이 경이롭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