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학기의 나비효과

by Sol Kim

2004년 여름이었다. 월드컵과 함께하던 고 3의 기억도 처절하게 보내던 재수학원의 기억도 어느새 희미해지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고 느낀 전율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던 그때.


밤늦게 학원에서 야자를 하다 힘들 때면 '대학만 가면 다 된다'는 말을 되새겼지만, 정작 대학 생활 초반에는 공부도 연애도 동아리 생활도 생각대로 되는 건 없었다. 관악산 한가운데 위치한 강의실 옆자리에는 다들 전교 1~2등 출신만 앉아있었고, 연애는 결국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 얘기였다. 테니스 치는 것은 즐거웠지만 동아리의 딱딱한 선후배 관계와 잦은 술자리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에라 모르겠다. 할 일도 없는데 계절학기나 듣자' 하면서 1학년 여름방학부터 학교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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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학기의 두 과목은 모두 교양과목이었다. 강의 주제들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수업이 아침 일찍이다 보니 어느샌가 눈이 스르르 감길 때가 많았고, 조는 와중에도 교수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또한 '그리스 연극의 이해' 수업을 간신히 버티고 집에 가는 평범한 하루였다. 인문대 건물에는 여러 동아리 및 행사 홍보를 위한 게시판이 있어 수십 개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는데, 한 포스터에 쓰여있는 짧은 문장이 내 눈을 잡아끌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우리는 그것을 무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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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조금 유치하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아마 피식 웃으면서 지나갔겠지만, 그때는 왜인지 등줄기에 바짝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연극, 무대라.. 저 텅 빈 암흑 같은 공간에 서 있으면 기분이 어떨까?


알고 보니 그 포스터는 인문대 연극 동아리 (인문극회)의 여름 연극학교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규모 프로젝트의 광고 문구 치고는 꽤나 거창하지만, 그 덕에 최소한 한 명의 눈길은 끌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다. 그날 바로 포스터의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고, 짧은 전화 통화 후 연극학교 등록을 마쳤다.


한 달간의 연극학교 후 인문극회 입회를 결정했으니 결국 이 날이 내 20대 초반을 연극과 함께 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남들처럼 여름방학에 해외여행을 갔다던가 미팅/소개팅에 열중했다면 이 포스터를 볼 일도 없었겠지?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계절학기를 듣는 바람에 연극학교 포스터를 보았고, 그 덕에 몇 년의 잊지 못할 경험과 평생의 취미를 얻게 된 걸 생각해 보면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한 날의 작은 선택이 우리 인생에 큰 나비효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