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나와라 뚝딱!

인생 첫 연극을 만들어 가던 과정

by Sol Kim

연극 좀 봤다 자부하는 관객에겐 아무래도 대부분의 아마추어 연극은 어설퍼 보일 수밖에 없다. 넘치는 열정이 연기로 이어지지 않는 초보 배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구도와 흐름의 연출, 뭔가 아쉬운 무대 및 소품까지. 하지만 이런 연극 한 편을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로 아마추어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세 개의 해트 모자'의 경험을 이용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개막 2~3개월 전


가장 먼저 연출과 기획이 선출 (혹은 지명)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대본을 검토한 후 공연할 대본을 선택한다. 작품 선택은 사회 분위기, 극본의 내용, 흥행성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2004년 가을에 '세 개의 해트 모자'를 정기 공연 작품으로 정했던 이유는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진지한 대본 검토와 열렬한 토론을 통해 골랐던 작품임은 분명하다.


기획은 배우 및 스태프의 섭외, 공연 일정 관리, 펀딩, 홍보 자료 제작 및 배포, 공연장 확보 등 극 전반을 총괄하는 중책 중의 중책이다. 개인적으로 배우/연출/스태프 간 갈등이 발생할 때 크게 번지지 않도록 중간에서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본다. 힘든 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잘하면 티가 안 나지만 못하면 공연 전체가 힘들어지는 점 등 여러모로 한 가정의 어머니와 많이 비슷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공연 포스터에서는 기획의 이름을 제일 앞에 (심지어 연출 보다도 앞에!) 놓는다.


연출의 임무는 기획이 만들어 놓은 전장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공연을 빚어 나가는 것이다. 대본의 해석, 배우들의 연기 모니터링 및 조언, 각 장면의 전체적인 모양, 등장인물 간의 호흡 등을 조절하는 연출의 역량에 따라 동일한 대본과 동일한 배우로 올린 연극이 다시 보고 싶은 명작이 될 수도 있고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졸작이 될 수도 있다. 공연을 보며 '배우들 연기도 좋고 극본도 좋은데 뭔가 좀...' 싶으면 십중팔구 연출이 극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고 보면 된다.



개막 1~2개월 전


공연에 필요한 인력, 시간, 장소 등에 대해 논의하고 확정해 나가야 한다. 인력이 충분한 동아리의 경우 오디션에서 배역을 놓고 경쟁하는 훈훈한 (?)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연극을 올리기 위한 최소 인원을 간신히 채우거나 심지어 이보다 모자라 배우를 어떻게든 수급해야 하는 상황도 적지 않게 벌어진다. '세 개의 해트 모자' 공연도 배우가 꽤나 모자랐기 때문에 많은 단역들을 삭제하고 무감 H 선배가 주요 단역인 흑인 무용수 역할을 맡아야 했으며, 심지어 한국예술종합학교 합격 후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당시 고3이던 동생 (배우 강서준)까지 단역인 늙은 군인 역할로 동원되었다.


배우들을 구하고 배역이 정해지면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서로의 친밀도를 높이는 (ice-breaking) 시간을 가진다. 최소한 주 1~2회씩 모여 선정한 대본을 읽고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여 극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 시기에 배우들이 충분히 친해지지 못하면 나중에 난이도 있는 장면을 만드는데 (i.e. 19금, 폭력적인 장면 등)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 개의 해트 모자'에서는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결혼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이 여관 주인과 대화하며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공연에서는 여배우가 여관 주인 역에 캐스팅되었기에 주인공을 맡았던 내 입장에서는 속옷만 남기고 바지를 벗는다는 게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출은 "무대 위에선 너는 배역인 '디오니시오'다. 네가 어색해하는 순간 관객들도 극에 몰입할 수 없다"라는 말로 계속 독려했기에 결국 이 장면은 대본 그대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대본 리딩과 연습 기간 동안 상대 배우와 꽤나 친해졌기에 실제 연습할 때나 무대 위에서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 장면을 연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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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직전 한 달


연출의 지도 하에 각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간이다. 최소한 주 3~4회, 연습당 3~4시간씩 다 같이 모여야 하며, 특정 배우의 연기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거나 특정 장면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 추가적인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다.


또한 배우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과정도 빼놓을 수 없다. 공연장에 있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관객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대사의 전달을 방해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를 무대 위에서 할 경우 공연장의 뒤쪽에 앉은 관객들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또렷하면서도 객석 끝까지 들리는 힘 있는 목소리” 내기 위해서는 몇 주에서 몇 달간 발성 (복부에 힘을 주어 공기를 강하게 밀어내는 목소리 내기)을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또한, 무대 위에서의 모든 움직임 (걸음걸이, 손동작, 제스처 등등)은 일상의 것들과 크게 다르기에 몸이 연기와 무대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경우 무대 위에서 두 팔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가 '세 개의 해트 모자' 공연 준비 내내 고민거리였다. 연기가 일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그때 제대로 깨달았던 것 같다.


마지막 1주일은 모든 공연 관계자에게 가장 체력적·정신적인 부담이 큰 시기이다. 공연 연습과 더불어 무대 제작, 소품 및 음향 준비, 조명 세팅, 공연 홍보물 배포 등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연 2~3일 전부터는 본격적인 리허설에 들어간다. 모든 관계자가 모여서 관객만 없는 상태로 공연을 진행하는 것이다.



공연 당일


칠흑 같은 어둠, 입장하는 관객들의 웅성거림과 발소리, 긴장한 동료 배우들의 침 삼키는 소리, 공연 소개와 박수에 이어 들어오는 조명, 빛을 향해 걸어갈 때 온몸에 돋아오는 소름...... 어떤 공연이든, 관객이 많든 적든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배우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경험이 많든 적든 긴장할 수밖에 없지만 적당한 긴장은 오히려 집중에 도움이 될 때가 적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연습이 충분한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그동안의 내 노력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 뿐. 관객이 많을 때 흥분해서 필요 이상의 과한 연기를 한 적도 있고, 객석이 한산할 때 긴장이 풀려 대사를 깜빡한 적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다 추억이다.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이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인 만큼, 그저 무대 위의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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