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는 늘 기다림과 싸워야 한다
내일은 미국의 대표적인 명절인 Thanksgiving이다. 미국은 워낙 땅덩이가 넓기에 대학 졸업 후 부모와 수천 KM 떨어진 타 주에서 직장을 잡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Thanksgiving이나 Christmas 연휴는 가족과 보내려고 하기에 이 즈음이 되면 비행기 가격은 평소의 두 배 가까이 치솟는다. 일터에서조차 Thanksgiving을 기점으로 연말 분위기가 나기 시작하며, 휴가도 다들 이 때 몰아 쓰다 보니 많은 업무들의 진척이 굉장히 늦어지거나 아예 다음 해로 미뤄져버리기도 한다. 업무 강도가 높은 소프트웨어 컨설팅 회사조차 이렇다면 일반 사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연말 분위기가 어떨지는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아실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직장인에게 연말은 그 동안의 강행군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월급 루팡 놀이도 할 수 있는 금쪽 같은 시간이다. 하지만 최소한 올해만큼은 이런 상황이 원망스럽기만 한데, 왜냐하면 나는 신분변경 서류 (i-485)를 내고 오매불망 영주권 승인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민에 적대적이었던 트럼프 정부는 미 이민국 (USCIS)에 압력을 가해 이민 절차를 엄격히 처리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USCIS 직원들을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각종 비자, 영주권, 시민권의 처리 기간이 최소 몇개월에서 몇년까지 길어졌으며, COVID와 재택 근무로 인한 업무 비효율까지 겹치면서 이민자들의 고통은 점점 가중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며 정책 기조는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USCIS의 업무 처리 속도는 과거보다 많이 느린 편이다.
이민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근로허가서 (EAD) 과 영주권 승인 절차의 지연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직업을 가지려면 적법한 신분 (취업비자, 영주권, 혹은 시민권) 혹은 근로허가서가 있어야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근로허가서를 받는데 드는 시간이 2~3개월에서 최소 7개월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다 (1년 넘게 기다리는 케이스도 있다). 만약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영주권도 EAD도 안나오고 근로 허가 기간이 만료된다면? 방법이 없다.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운이 좋다면 무급 휴직을 쓰면서 월급도 보험도 없이 하루 하루 버티거나 (이게 왜 운이 좋은 거냐고 묻지는 마시길. 잘리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래서 나처럼 신분 변경 서류를 넣은 이민자들은 '제발 EAD든 영주권 카드든 하나만 빨리 나와라' 두 손 모으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 워낙 지금의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 이달 초 미국 이민변호사 협회는 EAD 발급 지연을 이유로 USCIS를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런다고 상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COVID 19의 창궐로 인한 대량의 해고로 몸살을 앓았던 작년과 반대로 지금 미국은 역대급 구인난을 겪고 있다. 많은 일터에서 경쟁적으로 임금을 올리고 있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Now Hiring" 문구가 쉽게 보일 정도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노동 공급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근로허가서의 발급이 지연되어 일할 능력과 의지가 충만한 이민자들이 일을 못하는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상원의원, 옴부즈만 등 다양한 루트로 EAD 신속 처리 (Expedite Request)를 요청해도 결국 빈손이었다는 사람들의 사례를 인터넷으로 볼 때마다 '내가 왜 이 험난한 이민자의 길을 택했는지' 후회의 한숨만 나올 뿐이다. 나 또한 EAD 신속 처리 요청을 한지 3주가 넘었지만 이민국 홈페이지는 된다 안된다 말도 없이 그저 "접수 완료"라는 문구만 보여주고 있을 뿐. EAD든 영주권든 뭐 하나라도 손에 쥘 때까지는 이렇게 하루 하루 피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걸 알기에, 남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는 Thanksgiving 연휴에도 나는 맘 편히 쉬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늘도 아침 저녁으로 주문을 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