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 Kim Dec 31. 2021

당신만 나쁜 부모인 게 아니야

Angie Kim의 소설 Miracle Creek을 읽고

미국에 살며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독서량이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책도 자주 사고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면서 최소 연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한글로 된 책을 찾기도 힘들고 영어 책은 머리 아프고 속도도 나지 않으니 아예 책을 읽는 습관 자체가 희미해져 버렸다. 물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한국에서 나오면 간혹 e-book을 사서 읽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기기로 보는 책은 종이 책 특유의 '읽는 맛'이 없어서 쉽게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근 오랜만에 영어로 된 책 Miracle Creek을 샀고, 최소 몇 주 걸리겠구나 싶었던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불과 3일 만에 다 읽어버렸다. 


이 소설의 저자 Angie Kim은 초등학교 시절 미국 동부로 이민 와서 로스쿨을 졸업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작가 본인의 경험과 배경이 소설 전반에 잘 녹아 있는데, 이 소설은 미국 동부 버지니아에 사는 한인 이민자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  - 자폐 아동을 상대로 한 고압 산소 테라피 (Hyperbaric oxygen therapy) 센터 "Miracle Submarine"  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와 이에 따른 법정 소송을 그려내고 있다. 


2008년 더운 여름날 산소통에 연결된 튜브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테라피 시설에 있던 여러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고, 사망한 아이 Henry의 어머니인 Elizabeth가 범인으로 특정되어 재판이 시작된다. 이야기 초반만 해도 모든 증거와 증언이 일치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아이를 잃었음에도 덤덤해 보이는 Elizabeth의 태도까지 더해지니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자폐아인 아들을 돌보는데 지쳐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러 인물들의 거짓말과 숨겨진 진실들이 조금씩 드러나며 테라피 센터 주인인 Pak, 그의 딸인 Mary, 센터 투자자인 Janine, 그녀의 남편인 Matt까지 누가 범인일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게 된다.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그려나가며 숨겨진 사실과 인물들의 동기를 능숙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에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으며, 늦은 시간에도 책을 놓기가 힘들어 다음날 아침을 힘들게 맞이해야 했다. 재판이 벌어진 3일 내내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인 검사 Abe와 변호사 Shannon의 날카로운 공방 또한 이 책의 묘미 중 하나다. 또한 독자인 나 스스로가 미국 동부에 사는 한인 이민자이기에 한인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고 인종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에 고생하는 내용을 읽으며 더욱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책이 울림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장애아 부모의 처지와 심정을 너무나 세밀하고 자세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세 명의 자폐아 부모가 등장한다. 16살인데도 휠체어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엄마"라는 외마디 말만 할 수 있는 딸 Rosa를 둔 Teresa, 벽에 똥칠을 해 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어린 아들의 엄마인 Kitt, 그리고 아들을 사고로 잃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Elizabeth. 그들이 법정에서의 증언대화, 독백을 통해 풀어놓는 장애인 부모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읽으면서 새삼 내가 겪었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고 가슴 시린 한숨을 계속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Rosa를 도와주세요. 새로운 치료든, 약이든, 뭐가 됐든 좀 보내주세요. 주님. 제 삶을 다시 돌려주세요. 아들 Carlos의 삶도 되돌려 주세요. 무엇보다 우리 Rosa의 삶을 돌려주세요...


내가 어제 4시간 동안 뭐 했는지 알아? 똥을 치웠어. TJ의 새 버릇이 똥을 처바르는 거거든. 기저귀를 벗어서 똥을 바른다고. 벽, 커튼, 카펫, 어디든 말이야. 아마 이게 어떤지 짐작도 못할 거야. 둘 다 자폐아니 TJ랑 Henry랑 마찬가지라고? 그거 나한테 굉장히 기분 나쁘거든.


Henry가 검사에서 '더 이상 자폐 소견이 없음' 진단을 받고 나서 열린 자폐아 엄마 모임에서 엄마들은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몇몇은 심지어 울기까지 했는데 이는 기쁨에서 왔다기 보단 절망 ("딴 애는 좋아지는데 왜 내 아이는...")과 희망 ("딴 애는 좋아졌으니 우리 아이도...") 사이에서 왔을 것이다.

 

"딸이 죽기를 바란 게 아냐. 당연히 아니지. 그냥 생각만 한 거지. 난 차마..." Teresa는 끔찍한 생각을 짜내버리려 눈을 감았다. "난 딸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어. 그리고 딸은 살았지. 정말 감사했었어. 지금도 그렇고. 하지만..."
"하지만 그 기도가 맞는 기도였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Elizabeth의 말에 Teresa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얘를 왜 가졌지? 만약 얘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 삶은 훨씬 나았을 텐데. 회사에선 이사가 되었을 수도 있고, 전 남편과 같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전 세계로 휴가를 다니고 있겠지.' 퇴행에 대한 조사를 멈추고 피지 섬에 대한 걸 찾기도 했죠"
Teresa는 말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 그냥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갖는 거랑 똑같은 거지 뭐"
Elizabeth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부터, 정말 좌절스러웠던 그때요, 종종 아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한 번은 심지어 아이가 죽는 걸 상상하기도 했고요. 자다가 죽는 것처럼 고통이 없는 방식으로요. 그러면 삶이 어떨까요? 정말 많이 나빠질까요?"







위에 인용된 문구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찌 되었건 본인의 선택으로 낳은 자녀이고, 부모라면 자기 자식을 책임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나는 저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도 가슴 절절히 다가왔다. 마음이 힘든 날 밤마다 혼자 독한 술을 들이키며 속으로 씹어 삼키던 여러 말 못 할 독백과 한탄, 그리고 공상을 내 대신 말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여든이 되어서도 쉰 먹은 Rosa의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 Teresa, 자폐아 TJ를 포함해 5명의 자녀를 두고 사고로 세상을 뜬 Kitt, Henry의 '정상화'를 위한 집착을 내려놓고 아이 자체를 바라보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그날 아이를 잃은 Elizabeth. 만약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힘껏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만 나쁜 부모인 게 아니라고. 당신이 힘든 건 당신 잘못도 아이 잘못도 아니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 특수교육 정보 공유 사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