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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Jan 20. 2022

미국판 보이스피싱을 소개합니다

내가 겪은 Fake Boss Scam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보이스피싱에 익숙하다. 검찰청, 금융감독원, 국세청 등 이름만 들어도 괜히 움츠러드는 곳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위협적인 어조로 '당신의 재산이 위험하다'라고 어르고 달래는 데에 넘어가 소중한 돈을 지하철 역내 사물함에 넣어버렸다는 류의 이야기 한 번 안 들어본 분은 없을 것이다. 경험자의 말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가. 이런 거는 바보나 당하는 줄 알았는데..."라고 하니 아마도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희생자를 몰아가기 때문에 알면서도 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2017년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건 한국이나 중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세상에 FBI 에이전트는 얼마나 많고 자칭 IRS (국세청)나 USCIS (이민국)에서 전화는 얼마나 많이 오던지. '너의 계좌에 수상한 자금흐름이 보여', '작년에 미납된 세액이 수천 불인데 안내면 재판받아', '너의 SSN (Social Security Number, 한국의 주민번호)가 범죄에 사용되었으니 빨리 전화해' 등등 조금만 인생을 삐딱하게 살았어도 심장이 두근거릴만한 멘트들로 희생자들을 유혹한다. 초반에는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아니겠지...' 하면서도 괜히 찝찝한 마음에 밤잠을 설쳤지만, 이제는 아예 비슷한 문구를 읊기 시작하면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바로 지난주 금요일에 내가 겪었던 미국판 보이스피싱을 소개하려고 한다. 흔히 "Fake Boss Scam"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회사 중역인 척하는 사기꾼이 피해자에게 기프트카드나 물건을 사게 지시한 뒤 그것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이런 거에 걸리는 사람이 있나?'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회사에서는 서로의 핸드폰 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기도 하거니와, 처음부터 회사명, 임원명, 희생자의 이름까지 조사하고 나서 시도하는 터라 의외로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안녕 직원 A? 나 B 상무인데 지금 급한 회의 중이라서. 필요한 물품 좀 사다 줄래?'식이니 전화를 걸어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는 데다 내 이름까지 알고 있으니 덮어놓고 의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번 피해자 P라는 신입 직원으로, 내가 PM을 맡은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주 오후, 갑자기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더니 다짜고짜 "CEO가 나한테 기프트카드 600불어치를 사 오라고 했는데 이 번호가 맞니?"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순간 바로 싸한 느낌이 들었는데, 내가 아는 CEO는 이런 일을 잘 시키지도 않거니와 설령 시키더라도 자기가 신임하는 한두 명에게 일임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칭 CEO의 번호는 내가 아는 번호와 달랐고, 혹시나 해서 HR에게도 재차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P도 중간에 이상함을 눈치채고 카드를 보내지는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환불/교환에 자비로운 미국에서 몇 안 되는 환불 불가 품목이 기프트카드이니 결국 사기꾼 때문에 큰돈이 묶여버린 것이다.


사기꾼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 회사명과 CEO의 이름, P의 이름까지 철저하게 조사했다. 


내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HR도 빠르게 움직였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전 회사에 경고 이메일이 발송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직원도 비슷한 시도를 당했지만 다행히 타 주에 거주하기에 바로 사기인 것을 눈치챘다고 하니 (어떤 정신 나간 CEO가 1500km 떨어진 곳에 사는 직원에게 기프트 카드 심부름을 시키겠는가?) 결국 P만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된 것이다. 


나름 좋은 학교 나오고 똘똘한 P가 이런 사기에 걸려들다니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입장 바꿔 내가 신입사원인데 CEO가 개인적으로 뭔가를 부탁한다면 과연 의심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른 사람 등쳐먹으려는 종자들은 널렸으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씁쓸한 교훈을 다시 되새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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