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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Jan 05. 2021

Baseball Inclusion

야구로 하나 되자

4-5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금융 포용 (Financial Inclusion)”이 꾸준히 담론화 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탐욕적이고 약탈적인 기존 금융의 대안으로 제시된 금융 포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금융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서민, 취약 차주 지원 및 사회적 금융 활성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 금융 포용을 주제로 한 글을 읽었을 때, “금융”과 “포용”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이 생각보다 느낌이 괜찮음을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야구"와 "포용"은 어떨까?


 나의 첫 미국 생활은 유감스럽게도 굉장히 거칠게 다가왔다. MBA 입학을 위해 비행기에 타기 전 상상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들은 – 성별 및 인종을 불문한 다양한 친구들, 각종 파티 및 social, 적극적인 활동으로 얻어질 리더십 등등 –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큰 사고로 인해 전부 어그러지게 되었다. 동기들과 친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각종 사교 모임, company event 등에 대한 참여는 수업도 버거웠던 나에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목발 짚고 집 밖에 나와 버스를 타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가뜩이나 학위 취득 후에 당연히 은행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recruiting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나는 결국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친분을 쌓지도, 주류 모임에 포함되지도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Texas Austin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 같은 곳이다. 지금 살고 있는 Virginia의 Fairfax 지역이야 말로 자녀 교육, 한국 관련 인프라, 생활환경 등이 미국 어디와 비교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인데도 나는 아직도 기회만 되면 텍사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30년을 넘게 산 서울을 생각할 때에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데 왜 고작 2년 남짓 머무른 이 조그마한 도시가 이리 애틋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함께 운동한 Austin Braves 야구팀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늘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들이 두 팔 벌려 이방인을 환영했던 건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팀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문자를 보냈을 때 온 답은 “우리는 나무 배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네가 얼마나 하는지 입단 테스트를 해야겠어”였다.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야구를 하면서 언제나 팀 중심선수로 활동했고 여러 팀에서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던 내게 입단 테스트라니? 자존심도 상했지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신선하기도 했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미군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도 그다지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짧은 적응기만 거치면 금방 주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리그 유일의 동양인인 데다 유일하게 학창 시절 야구부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 나무 배트13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는 너무나 큰 벽이었다. 간혹 전직 MLB나 AAA 출신들이 공을 던질 때면 감히 안타를 치겠다는 생각은커녕 ‘몸에 맞지만 말자’고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갔으니 이 동네 야구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다가 기껏 잘 맞은 타구가 나와도 기가 막힌 움직임으로 건져내는 상대팀 수비수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신체조건, 야구 경험, 기술, 센스 등 어떤 면에서도 비교 우위를 찾기 어려웠으며 개인 연습과 레슨을 통해 계속 노력하였음에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벽을 느끼기도 여러 번이었다. 


 즐기기 위한 야구가 스트레스가 된다니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Austin을 떠나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Braves와 계속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종도 나이도 성장배경도 다른 20여 명의 성인들이 “야구”라는 언어를 통해 하나가 되어 승리를 위해 노력하는 경험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발로 나가는 건 셋 중 한 게임 정도였지만 늘 경기 전에 일찍 나가서 선발 라인업의 선수들을 위해 배팅볼을 던져주었고 대타나 대주자로 투입될 때를 대비해서 더그아웃 바깥에서 스윙을 반복했다. 계속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니 언어도 서툴고 야구도 못하는 동양인임에게도 한 마디씩 조언을 해주고, 게임이 없는 날에도 서로 안부를 물으며 조금씩 팀의 일원이 되어갈 수 있었다. 구직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도 잘 풀리지 않아 고민했을 때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어떤 자리든 만들어주려 노력한 친구도 여럿이었고 결국 Virginia로 옮기게 되었을 때 가장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것도 이들이었다. 마지막 경기에서 외야를 보던 나를 마운드로 불러서 팀 전원이 사인한 배트를 선물하던 은퇴식은 아마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Baseball Inclusion. 많은 사람들에게는 와 닿지 않겠지만 나는 이 주제로 논문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다. 미국에서 살며 내가 주류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걱정이 크지 않음은 야구를 통해 얻은 인연과 소중한 추억, 그리고 한번 해봤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야구하다 다리도 부러뜨린 주제에 이래서 아직도 야구를 포기할 수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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