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치열했던 라이벌전
9월 18일 일요일, 팀원들과 함께 플레이오프를 위해 운동장으로 향했다. 상대가 1위 팀이긴 했지만 사실 전력이든 승패든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고, 지난 몇 년간의 전적도 꽤나 좋았기에 차 안의 분위기는 가벼웠다. 리그 1위 팀과 하는 경기라 고등학교/대학교 시합에서 쓰이는 가장 좋은 운동장을 배정받은 데다 더그아웃과 시설도 좋다는 말에 평소와 달리 아들까지 데리고 나섰다.
1. 인생은 계산처럼...?
세시에 경기 시작이니 7이닝 다 한다 쳐도 대충 다섯시 반이면 끝날 거고, 아무리 늦어도 일곱시엔 저녁 먹고 애 목욕시키고 재울 수 있겠구나 하는 계산이 서 있었다. 하지만 경기 시작 5분 전까지 운동장은 잠겨 있었고, 털레털레 나타난 운동장 관리인은 "미안, 30분 정도 몸 풀면 되지? 내가 늦게 왔으니 30분 더 줄게"가 끝이었다. 또한 리그 상위권 팀들의 경기라 팽팽한 투수전으로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첫 이닝부터 난타전이 벌어지며 경기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팀 선발투수는 제구 난조 끝에 첫 이닝도 마치지 못했고, 부상이 있다던 상대 팀 선발도 평소보다 빨리 마운드를 내려갔다.
2. 플레이오프는 다르다
내가 뛰는 팀 앤젤스나 상대 팀 헌터스나 다들 공격, 수비, 주루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팀들인데도 경기 중에 수비 및 주루 실책이 밥먹듯 나왔다. 아마도 중요한 경기이기에 다들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으리라. 나만 해도 장타를 치고 3루까지 내달리다 죽기도 하고 지나친 리드로 포수 견제에 걸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기도 했으니 남들 탓할 자격이 없다.
또한 평소와 다르게 판정에 대해 항의가 많이 나왔고, 덕분에 양 팀 대표뿐 아니라 때로는 심판들까지 얼굴을 붉혀야 했다. 물론 판정에 불만이 생기면 항의야 할 수 있다. 하지만 리그 측에서 몇 번이나 사전에 강조했던 '항의는 감독을 통해서만' 원칙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불만을 토하던 몇몇 선수들의 태도는 아직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3. 용호상박
야구를 10년 넘게 하면서 650 경기 가까이 뛰어 왔지만, 몇몇 경기들은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거나 쓴웃음이 나온다. 아마 이 경기도 그 쐐기 같은 추억 중 하나가 되리라.
세 시간 반에 걸쳐 벌어진 혈전.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순간들을 거쳐 12:10으로 뒤진 상태에서 7회 말 공격이 시작되었다. 안타와 볼넷, 상대 실책을 통해 동점을 만들었고 이어진 2 아웃 주자 1,3루. 타자는 오늘 2안타로 타격감이 좋던 2번타자였다. 그야말로 끝내기 찬스.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오심이 나왔다. 2볼-1스트라이크를 1볼-2스트라이크로 착각한 심판이 네번째 공에 (2볼-2스트라이크가 아닌) 삼진 콜을 내리며 이닝을 끝낸 것이다. 타자와 감독 모두 펄쩍 뛰며 항의했지만, 이제나 저제나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다음 팀들의 압박으로 인해 도저히 게임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 팀은 이렇게 동점으로 게임이 끝난다면 1위 팀 advantage로 자기들이 결승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리는 리그에서 사전에 규정한 대로 무승부 없이 끝장 승부를 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30분이 넘는 논쟁 끝에 옆 운동장으로 옮겨서 이어진 연장전. 식사도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세시간 반이나 집중해서 게임을 했으니 다들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투수가 바닥난 우리 팀은 5이닝 넘게 던지고 내려간 중간계투를 다시 마운드에 올렸고, 그는 첫 이닝을 1실점으로 가까스로 막아냈다. 주자가 둘 있던 상황에서 마지막 타자의 우중간 장타성 타구를 내가 간신히 걷어내지 못했다면 승부는 그대로 막을 내렸으리라. 좋은 수비에 이은 좋은 공격으로 끝내버렸으면 좋았으련만, 이어진 공격에서 우리 팀도 고작 한 점을 내는데 그쳤고 결국 2차 연장전 (9회 초)에 에러가 연달아 터지며 점수를 5점이나 내주고 말았다.
4.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18대 13으로 벌어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상대 헌터스 팀의 더그아웃과 응원단은 흥이 오를 대로 올랐고 우리 더그아웃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깨가 가벼워진 상대 투수는 손쉽게 아웃 두 개를 잡아냈고, 세 번째 타자로부터도 3루수 땅볼을 유도해냈다. 여기서 발생한 3루수의 송구 에러가 무슨 조짐이었을까? 이후 세 타자 연속 2루타가 나오며 5분만에 두 점 차로 따라붙었다. 수비수들로부터 탄식이 흘러나오고 "역시 저력 있네..."라는 말까지 들려오는 상황. 하지만 동점 주자까지 나가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타자는 9이닝 내내 고생했던 포수였고,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그의 방망이는 공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5. 불태웠어... 불태워 버렸어... 새하얗게...
대타나 대수비 요원 한 명만 더 있었다면
아까 7회 말의 어처구니없는 삼진 오심만 아니라면
9회 초에 에러가 하나만 덜 나왔어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장장 네 시간 반 동안 혈전을 벌이며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었기에 생각보다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9이닝짜리 미국 리그도 이렇게까지 오래 걸렸던 적이 없었는데 끽해야 7회까지 하는 한국 리그에서 네 시간 반 경기라니? 오히려 점심도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지루하게 밤 8시까지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굳이 긍정적인 걸 꼽아 보자면 간만에 5타수 4안타로 밥값을 한 것이지만, 팀이 진 상황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랴?
아무튼 2022년의 DMV KBL (DC/Maryland/Virginia Korean Baseball League)의 플레이오프 경기는 다른 무엇보다 바닥까지 하얗게 불태웠던 치열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