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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Dec 17. 2022

팔았다, 서글픈 이민 생활을

어제 저녁, 차를 샀다. 아니, 팔았다. 


미국에서 차를 구매하는 경우 기존에 쓰던 차를 Trade-in 하는 경우가 많다. 쓰던 차를 딜러에게 팔고 매각대금을 새 차 가격에서 빼는 식이다. 내가 몰던 2009년형 Camry를 넘기는 조건으로 차 가격을 받았기에 차 열쇠, 차 소유 증서 (title), 등록증 (registration)등을 모두 딜러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3년 반 가까이 몰고 다니며 정이 많이 들었기에 굉장히 섭섭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큰 감흥은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두 시간 넘게 달린 탓에 아쉬움을 느끼기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미미하게 올라온 감정은 안도감과 후련함에 가까웠다.






2019년 여름, MBA를 졸업하고 텍사스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자동차'였다. 대중교통만 타도 생활에 문제가 없는 서울이나 차 한 대로 어떻게든 생활이 가능했던 텍사스 Austin과는 달리, 내가 이사 온 Fairfax는 Washington DC에서 차로 30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으로는 출퇴근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자차로는 빠르면 15분이면 가는 거리가 대중교통으로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리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행에서 지원받은 유학자금을 반환하고 이사비까지 지출했던 그 당시에는 여유자금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동네 딜러십에서 쓸만한 차를 사려면 최소 만불에서 만 오천 불 정도가 들었으니 그림의 떡이었고, 몇천 불짜리 차는 최소 15만 km는 주행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라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때 나타난 친구의 도움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명줄이었다. 이 동네에 살다가 이사 간 누나의 중고차 Camry를 저렴한 가격에 넘긴 것이다. 이 차종은 원래 잔고장 없이 오래 굴러가기로 유명해서 중고차 가격도 높은 편인데, 고작 10만 km 정도의 주행거리에 별다른 이상 없이 잘 굴러가는 차를 단돈 5천 불에 넘겨주었다. 아마 업자에게 팔았으면 최소 2천 불은 더 받았을 테니 친구는 나에게 큰 선심을 쓴 셈이다.






하지만 이 차는 - 친구와 친구 누나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 힘들고 괴롭던 이민 생활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곳곳에 있던 크고 작은 흠집, 흑백으로 짝짝이인 백미러, 차에 타자마자 강렬히 코를 찌르던 가솔린 냄새까지 자동차는 고난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것이 미국 정착을 위해 아등바등 부딪히고 상처받던 우리 가족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차체에서 서서히 벗겨져 나가던 흰색 도장과 그 아래 드러난 거친 금속 표면을 보면서 '나는 속이 타는데 너는 겉이 타는구나' 고소를 머금기도 했다. 차를 인수한 지 거의 3년이 지나 영주권을 받고 나서야 흰 페인트를 구해서 작업을 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결국 수습은커녕 얼룩덜룩 울퉁불퉁 누가 봐도 뭔가 이상한 몰골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망했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와중에도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습던지... 얼마 전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뒷좌석의 동승자들에게 "누가 잘 좀 들이받아 줘서 새 차로 바꾸면 좋겠네" 농담을 하면서 '아, 이제야 내가 좀 살만해졌구나' 깨닫기도 했다. 


차를 바꿨으면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는 게 보통일 텐데, 왜 뭔가 마음 한구석이 휑한 느낌이 들까.

어쩌면 나는 차와 함께 그동안의 힘들고 서글펐던 삶의 순간까지 내려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고마웠다. 나보다 더 좋은 주인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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