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속의 Sing Along

by Sol Kim

태민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은 서서히 왔는데, 한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부모님이 아이를 보자마자 "와, 얘가 정말 많이 컸네?" 하고 놀라는 순간, 아 이제는 인정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먹는 양이 두 배가 됐고, 한동안 변화가 없던 키와 몸무게가 주 단위로 바뀐 지도 꽤나 되었다. 그리고 행동 또한 꽤나 바뀌었다. 동영상을 볼 때 이제는 거실에서 온 가족과 함께 보는 대신 혼자 소파 한 구석으로 가거나 자기 방으로 슬그머니 사라지며 문을 닫는다. 별다른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날도 많은데, 그럴 때면 내 안에서 두 자아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렇지 않아도 자폐 때문에 키우느라 힘든데 이 놈의 자식이...'하는 억울한 생각이 먼저고, 거의 곧바로 '그래, 너도 사람인데 당연히 이걸 겪어야지.'가 올라오면 애잔한 감정이 마음을 채운다. 이 묘한 감정의 연속, 나도 와이프도 육아의 새로운 챕터 앞에 서 있다.


그래도 아이가 성장하니 좋은 게 있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능력, 소위 receptive language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집안일 하나를 시키려면 아이 곁에 붙어 서서 step by step으로 지시해야 했다. "태민아, 이 그릇 들어. 자, 이제 싱크대로 가. 그릇 내려놔." 이런 식으로. 그게 이제는 "태민아, 이거 위층/싱크대/지하에 가져다 놔" 한 마디로 끝난다. 그중 백미는 단연 빨래다. 태민이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진동을 좋아하는데, 덕분에 내가 세탁기에 세제만 부어놓으면 나머지는 태민이의 차례다. 세탁물을 넣고, 세탁기를 돌리고, 끝나면 건조기로 옮기고, 섬유유연제를 넣고, 건조가 끝나면 빨래 바구니에 꺼내놓는다. 완벽하게.


이게 왜 기쁜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느리지 않은 아이를 키운 부모, 혹은 아이가 없는 분들에게 이건 그냥 일상적인 집안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가 낮으면 작은 성취에도 세상을 다 가진듯 기쁘게 마련이다. 억지로 비유를 들자면, AI에게 별생각 없이 복잡한 업무를 던졌는데 2분 만에 완벽하게 정리된 결과물이 돌아왔을 때의 느낌이랄까.




어제 공원 트레일을 걸으며 버지니아의 봄을 즐겼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 마냥 오늘은 쌀쌀한 날씨에 진눈깨비가 흩뿌린다. 두꺼운 눈발 속에 서행하는 차선.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뒷좌석의 태민이에게 말을 걸었다.


"태민아, 우리 같이 Sing along 해볼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Sing along이라는 개념을 이해할지도 몰랐고, 설령 이해해도 반응이 없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잔잔한 노래가사 위로 아이의 청량한 목소리가 얹히기 시작한다. 가늘게 때로는 부드럽게. 박자가 조금 어긋나도 상관없다. 진눈깨비가 내렸고, 우리는 노래했다.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좋든 싫든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 비해 여유로운 시간을 누린다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술잔을 내려놓는 친구들의 한숨 속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 한국을 떠나면서 동년배들 대비 자산 형성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도 분명히 깨닫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날 제일 힘들게 하는 건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주고받는 대화가 태민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수준 높을 것을 볼 때이다. 난 최선의 선택을 했고 태민이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주었으며, 심지어 이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 기적이라 불리는 것이겠지.


비교하지 않으려 한다. 나와 아이의 속도로 가려 노력한다. 각자 가진 게 다르고 타고난 게 다르니까.

그저 태민이의 하루가 행복하길. 그의 미래가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길. 그리고 그 와중에 나와 아내의 삶이 너무 뒤로 밀려나지 않길.


진눈깨비는 내일이면 녹겠지. 봄은 다시 올 것이고, 그러면 다시 걸어 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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