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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Feb 13. 2021

트럼프의 선물

천금보다 값진 한마디

필자는 태어나서 한번도 도널드 트럼프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대통령 당선 전 부동산 재벌이자 이슈 메이커로 각종 언론 및 찌라시를 장식할 때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흔한 돈 많은 관심종자인가 생각했을 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이 사건이 미국 및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분석한답시고 팀 전체가 야근한 덕분에 처음으로 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던 것 같다. 미국에 와서 그가 'American First'라는 명분 하에 내놓는 이민자 압박 정책을 보면서 점차 그에 대한 감정은 혐오로 바뀌었고, 미국에서 취업한 뒤 비자 및 영주권 절차를 진행하며 그가 만든 정책들의 악영향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뭐, 그는 필자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꼭 감정이 쌍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랬던 그가 퇴임 직전 하나의 선물을 남기고 갔다. 


현재 미국의 H1B (취업 비자)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기에 매년 모든 신청자를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선택된 사람에게만 비자를 내준다 (대학교 및 비영리기관 취업자 등 극히 일부 제외). 워낙 지원자가 많기에 작년 기준으로 학사 학위자는 약 25%, 석사 학위자는 약 35~40% 정도만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올 1월 경 트럼프가 퇴임 전 내놓은 정책은 직업별 / 지역별로 비자 제공 순서를 정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 정책대로 3월 말에 비자를 접수한다면 필자의 비자 취득 확률은 사실상 100%나 마찬가지였다. 작년 3월 이후 매일같이 스트레스를 주던 신분 문제가 한번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 정책의 수혜자였던 인도 계열 언론사들은 난리가 나서 매일 같이 '불공평'한 새 정책을 취소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특히 일부 인도 인력 파견업체 (staffing company)들의 경우 시스템을 악용하여 돈을 벌어왔기에 (임금이 저렴한 현지 인도 IT 기술자들을 위한 비자를 대량으로 신청한 뒤 실제로 고용된 인력만 미국에 불러오는 식. 수많은 당첨된 비자가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다) 제도가 변하면 밥줄이 끊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이번에 뽑힌 부통령이 인도계라 인도 쪽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긴 했지만, 그동안 인력 파견업체들이 수년간 보인 관행의 문제점은 미국 정부에도 잘 알려져 있었기에 설마 이 정책을 되돌리지는 않겠지 생각했었다.








지난 2월 초, 설마 하던 그 일이 벌어졌다. 미 연방 이민국 (USCIS, U.S. Citizenship and Immigration Services)에서 공식적으로 새 정책의 시행을 올해 말로 연기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필자는 다시 작년과 마찬가지로 35~40%의 확률을 노리고 3월 말의 비자 추첨을 기다려야 한다. 처음 뉴스를 봤을 때는 와이프에게 "될 사람은 되니까"라고 의연하게 대꾸했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필자의 마음은 좌절과 절망, 대상 모를 증오로 들끓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는 거지? 평소와 다름 없던 아이의 징징거림에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집어던지고 나서는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에 엎드려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를 번쩍 안았다. 

"미안해 태민아. 널 위해서 여기 남으려고 하는데, 아빠 너무 힘들다... 이제 어떡해야 하니?"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기도"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자폐로 인한 발달 지연과 이중 언어라는 두 가지의 장벽으로 인해 태민이의 언어는 또래보다 몇 년은 느리다. 비록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주고 받는 대화는 기초적인 수준이며, 질문에 대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아이의 입에서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기도"라는 말이 나오다니. 



그래. 네가 30년 된 기독교인인 아빠보다 낫구나. 정말 잘 컸구나...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기에 그저 매일 같이 기도한다. 여기까지 인도하셨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제발 비자를 허락해 달라고. 비자가 당첨될지는 3월이 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이번에 받은 진짜 선물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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