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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Feb 07. 2021

두 번의 작별인사 (Farewell Again)

Austin Braves 야구팀과의 추억 그리고 이별

2019년 5월 19일 (May 19, 2019)


설레야 할 야구장 가는 길이 마치 치과에 가는 길인 양 망설여진다. 피하고 싶어도 참아 넘겨야 하는 치과 의자 위의 시간처럼, 작별이 올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인사를 하러 야구장으로 향해야 했다. 지난 2년간 내 집 같았던 Austin의 Downs Field.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오자마자 슬라이딩 사고로 다리를 분질러먹고 수술하느라 시즌을 통째로 날리기도 하고, 이 악문 재활 끝에 2018년 복귀 시합의 마지막 타석에서 우익수 훌쩍 넘기는 2루타를 날리기도 했었지. 공이야 잘 맞을 때도 안 맞을 때도 있었지만 (아니, 사실 대부분 잘 안 맞았지만...) 타지 생활에 외롭고 스트레스 받을 때 그 주에 야구 시합이 있다는 것 만으로 하기 싫은 일들도 거뜬히 버틸 수 있었는데.


Austin Downs Field의 전경


이 시합을 마치고 나면 금요일에는 졸업식, 그리고 그 다음주 수요일에는 인천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아직 마지막 하나의 인터뷰가 남아 있어 인사팀의 눈치를 보면서도 비행기표를 끊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다음 주 목요일 이전에는 더 이상의 시합이 없고, 이는 Austin Braves의 친구들을 더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캐치볼을 한 뒤 배팅볼을 던져주었지만, 웃는 얼굴과는 달리 마음속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울컥거리다 잠잠해지곤 했다.


상대팀 Rangers의 선발은 무시무시했다. 딱 봐도 최소한 80마일 중반 (약 135km)은 되어 보이는 강력한 패스트볼을 앞세워 우리 팀의 타자들을 제압해 나갔다. 필자는 130km를 넘어가는 순간 커트조차 버겁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큰 욕심 없이 맞지만 말자 타석에 나섰지만, 그래도 공이 눈에 들어오는 찰나의 순간엔 어떻게든 치려고 노력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간신히 배트를 가져다 댔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 뿌지직. 


맙소사. 지난 2년간 연습장에서나 시합에서나 나와 함께했던 Easton사의 대나무 배트는 이렇게 내 곁을 떠났다. 내야 안타를 이별 선물로 남기고. 


You served me well my friend.



졸업이 하루하루 다가오며 언젠간 친구들에게도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며칠 전부터 어떻게 팀원들에게 안녕을 고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지만, 경기가 끝나고 실제로 팀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하고 이별을 고하면서 든 생각은 'I am NOT ready yet'. 머릿속에서는 '사랑하는 Austin을 떠난다'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날 처음 그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향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저를 Austin으로 보내시고 이런 좋은 팀에서 친구들과 운동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근데... 이렇게 떠나려니 너무 힘들고 아쉽네요"



안녕, 사랑하는 친구들. Austin에 계속 남아서 계속 얼굴을 보고 같이 운동하고 싶었어.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열리지 않네.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2019년 5월 29일 (May 29, 2019)


   필자: Hey, David, What's up? I am back! (David 안녕! 나 돌아왔어!)

   David: What? Sol!! Didn't you say you are going to go back to Korea? What happened? (어? 너 한국 돌아간다지 않았어?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이 날은 필자가 한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어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졸업식 하루 전날 오퍼가 왔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2일 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오퍼를 수락하고 나서 포장 이사 예약을 취소하고, 버지니아로의 이주 계획을 세우고, 전 직장에 연락해서 복직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하고 15만 불에 달하는 거액의 학자금을 갚았다. 감독인 Scott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Virginia로 이사 가는 6월 말까지 계속 나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되지! 무조건 선발 라인업이다"라는 파격적인 답을 하며 환영해 주었다. 그래. 한 달간의 시한부 연장이지만 그거라도 어디냐. 감사를 몇 번 해도 모자라지...








2019년 6월 21일 (June 21, 2019)


두 번째 마지막 게임. 심지어 상대팀은 2018년 가을리그에서 잠시 몸담았던 Cyclones였다. 아군과 적군(?) 모두에 친구가 있는 흔치 않은 상황. Austin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최고의 상황이 아닌가!


2019년의 타격은 최악이었다. 2017년은 적응단계에서 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2018년은 재활 후 복귀한 탓에 초반에는 주춤했지만, 점차 타격감을 회복하여 가을리그에서는 나름 팀에서 중간 정도는 친다고 자부할 정도로 좋은 느낌을 이어갔다. 겨우 내 웨이트를 하면서 힘을 길러서 2019년은 뭔가 보여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시즌 초반부터 헤매는 타격 탓에 언제부터인가 선발 라인업에서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어쩌다 한번 찾아오는 찬스에서는 뭔가 보여주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서 헛손질하기에 바빴다. 그랬기에 이 게임에서도 절실한 마음으로 '제발 딱 하나만, 딱 하나만 치고 가자!!' 하는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갔다.


첫 타석. 키 크고 마른 투수. 승부 내용은 솔직히 기억에 없다. 기억나는 건 직구를 쳐서 우익수 쪽 안타를 만들어 냈다는 것. '첫 타석 안타? 이번 시즌 처음 아닌가?' 


둘째 타석. 최소한 100kg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투수. 덩치에 비해 공은 생각보다 말랑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예상하고 잔뜩 노렸는데 예상외로 공은 스트라이크 존 바깥 위로 날아왔다. 배트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고, '안돼!!'라는 마음의 소리와는 달리 공은 이미 튕겨 나가고 있었다.
"Run!!! Run!!!!" 

어라? 이게 파울 라인 안쪽으로 들어가네. 외야수는 열심히 공을 잡으러 뛰어갔고 여유 있게 2루 베이스에 안착했다. 벌써 2안타.


마지막 타석. 상대 투수의 공은 그냥 어마어마했다. 130km가 넘는 공들에 익숙해진 필자에게도 '이건 뭐지?' 싶었으니까. 87~90마일 (약 140~145km)이 된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Braves의 강타자들이 줄줄이 삼진을 먹고 더그아웃에서 배트나 헬멧을 던지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일이 반복됐다. 필자야 뭐 이미 안타도 두 개나 쳤겠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임했다. '나는 이런 공은 어차피 못 쳐' 같은 자포자기였나 싶기도 하다. 

1구. 직구에 헛스윙. 타석에서 보니 위압감이 훨씬 심하다.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숨을 가다듬는다. 

2구 역시 직구. 살짝 가운데로 몰렸다. 스윙하는데 약간 늦은 느낌. '아, 파울이겠다.' 하지만 "빠악"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는 라인드라이브로 우익수를 향해 날아갔다. 

1루를 향해 뛰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잡지마라잡지마라잡지마라...'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공이 그라운드에 닿는 순간 Braves 더그아웃은 난리가 났다. 그럴 법도 하다. 직전 열몇 타석에서 친 안타가 3개였던 내가 오늘 게임에서만 3안타를 쳤으니. 








Braves가 몇 점 차로 리드하고 있던 마지막 이닝. 늘 그렇듯 우익수로 수비를 나간 상태에서 어느새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았다. 이제 타자 하나만 더 잡으면 게임이 끝나는 상황. 


갑자기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가더니 필자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수비 교체? 지금 굳이?' 잘 이해는 안 가지만 감독이 시키니 선수가 별 수 있나. 천천히 더그아웃으로 뛰어가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내야수들이 전부 마운드로 모이고 있고,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마운드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라고 한다. '뭐야. 나보고 투수를 하라는 건가? 아무리 마지막 게임이라지만 이러다 잘못하면 역전당한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 - 다 이긴 게임을 말아먹은 패전 투수가 될 수도 있다는 - 을 느끼며 마운드로 향하는데, 외야에 있는 선수들과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까지 마운드로 다가오고 있다. 대체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필자를 위한 은퇴식이었다. 


마운드 위에서 Braves 팀원 한 명 한 명이 악수를 청하고 포옹을 하며 필자의 새 출발을 응원하고 축복해주었다. 상대팀 Cyclones 더그아웃에서도 사정을 알고 박수를 보내 주었으며, 몇몇 친한 선수는 악수하러 오기도 했다. 평생 한 팀에서 뛴 레전드 선수도 아닌, 고작 2년여 함께한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게 이런 송별이라니?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이벤트였고, 필자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 중 하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2년이 지났지만 필자는 이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그때의 뭉클함이 떠올라 코 끝이 찡해지는 걸 느낀다. 은퇴식에서 받은 팀원 전체의 사인이 담긴 나무 배트는 지금도 보물 1호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필자의 보물 1호. 배트의 원 주인 Andrew가 수줍게 쓴 "♥HYUNG"이 인상적이다. 어디서 저 단어를 배웠을까?



아직도 종종 연락을 하며 안부를 전하는 Austin Braves 친구들. 필자가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Hey Bravos, it has been my honor and pleasure playing ballgame with you brothers. I would not say "Good bye", but rather say "See you again". 

(Braves 여러분, 함께 야구할 수 있었던 건 저의 영광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안녕"이란 말 대신 "또 보자"라고 인사할게요) 



Once a Brave, Always a Brave!




P.S. Andrew Hyung, 기억해줘서 고마워. I still remember you all as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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