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를 보고 배워요
미국 학교에서는 정말 다양한 행사를 많이 개최한다. 월별 계절별로 소풍, 발표회, 스포츠 등 크고 작은 다양한 이벤트들. 지금 살고 있는 버지니아의 초등학교는 행사를 그리 많이 하지 않지만, 전에 다니던 텍사스의 초등학교에서는 거의 매달 뭐든 하나씩은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2학년이고 그때는 Kinder (0학년)이어서 더 행사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만 해도 학부형이 된 지 얼마 안 우리 부부는 학교의 다양한 이벤트들에 큰 열정을 가지고 참여했다. 태민이가 어시스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친구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찼고,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왜 우리 부부는 그렇게 행사에 열심히 참여했을까? 다른 부모들처럼 공부나 운동을 같이 시킬 팀을 만들기 위해? 아니면 학교 선생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태민이가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폐 아동들이 또래는 물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매우 적기 때문에, 많은 자폐 부모들은 “사회성(social skills) 발달”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어떻게서든 태민이가 다른 아이들과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도록 “사회성 그룹치료”는 물론이고 또래 아이들과 play date도 열심히 계획해본다. 물론 야심차게 계획한 play date에서 아이가 혼자 떨어져서 노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너지지만 (사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이런 정도로 좌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이가 또래와 조금이라도 소통할 수 있는 다른 행사나 모임을 찾아본다. 이벤트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런 우리 부부에게 생일파티는 정말 고마운 이벤트이다. 학교에서 생일파티에 반 아이들 모두를 초대하도록 정해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예 초대를 안 하는 것은 자유지만 초대하려면 학급 전체에 초대장을 보내야 함) 친분에 상관없이 초대받는 일이 많다. 한 반에 20여 명의 아이들이 있다 보니 꼭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같은 반 친구로부터 생일파티 초대를 받았고, 주중의 다양한 일들로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초대를 받은 파티에는 거의 무조건 달려가곤 했다.
이전의 태민이는 “생일”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생일파티를 통해서 여러 개념들을 익힐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생일파티에 가기 위해서는 카드와 선물이 필요하고, 생일 파티에는 풍선, 생일 케이크와 초, 여러 장식들이 있으며, 파티에서는 친구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고 기념촬영을 하는 등의 절차가 있다는 점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백번 이게 뭐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이런 행사에서 한 두 번 경험함으로써 훨씬 빨리 배우는 것이다.
태민이는 환경 변화 및 청각 자극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요란한 키즈카페 장식, 조명, 소음 등을 견디지 못하고 생일파티에서 선물만 주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참석하다 보니 생일파티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태민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노래할 때는 같이 노래하고, 남들이 박수 칠때 따라서 하는 등 상황과 맥락에 맞는 행동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래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면서, 어느샌가 다른 아이의 노는 모습을 모방하려 하고 어떤 때는 서툴게나마 같이 놀려고 하기도 했다. 아무리 미국 학교에서 일반 아이들과 태민이를 같은 공간에서 교육시킨다 해도, 태민이의 특성상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의 원활한 소통이나 어울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 놀다 보면 태민이처럼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아이조차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안 해본 것을 시도하며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괜히 '어린이는 친구가 스승'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태민이 뿐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도 생일 파티 참석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 놀이터 아니면 키즈카페에서 생일파티를 하는데, 아이들과 부모까지 수십 명씩 오다 보니 태민이가 또래랑 잘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주변 눈치를 신경 쓰지 않고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생일파티는 다른 학부모들과 만나서 안부를 나누고 각종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교류의 장소이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언어 장벽도 있는 이민자인 우리에게 미국 부모들의 테라피 추천, 지역 정보 공유 등은 많은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