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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Feb 11. 2021

앨러지 vs 알레르기

발음만큼 다른 한미간 Allergy 대응에 대하여

Allergy: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는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 등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 


Allergy를 미국에서는 "앨러지"에 가깝게 읽는 반면 한국에선 "알레르기"라고 읽는다. 사족이지만 필자는 알레르기 (Al-le-r-gy)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만화 '드래곤 볼'의 에네르기파가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초등학생 때 에네르기파가 'E-ne-r-gy+파(波)'라는 걸 알고 얼마나 허탈했던지.


받아라!! 알레르...아니, 에네르기파!!!



필자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평생 알레르기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봄에 독한 황사나 꽃가루가 몰려와도 그냥 재채기 몇 번 하고 끝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견과류도 그냥 맛있는 간식이자 영양 공급원일 뿐. 처음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Texas Austin은 Cedar (삼나무) 알레르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알레르기와 별 상관없던 사람들마저도 꽃가루가 날리는 철이 되면 코가 막히고 심할 경우 눈까지 퉁퉁 붓는 등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필자에게는 이마저도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이야 돈에 신분에 스트레스 받다 보니 평생 없던 알레르기가 생겨서 마음이 힘들 때마다 피부를 벅벅 긁고 있긴 하지만. 이런건 미국 알레르기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조금씩 먹으면서 / 노출하면서 적응하면 되지'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랬던 필자에게 알레르기의 심각성을 알려준 두 개의 사례가 있다.


#1. 아침부터 와이프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겉보기엔 심각해 보이지 않았기에 회사에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와이프가 '오늘 몸이 안 좋으니 같이 병원에 가달라'고 해서 급하게 휴가를 쓰고 동네 내과에 방문했다. 의사가 혈압을 재더니 하는 말이 '큰 병원 가셔야겠는데요'. 바로 큰 병원에 가서 주사를 세대나 맞고 저녁까지 있다가 퇴원했고, 그 이후에도 며칠간 통원치료를 하면서 주사치료와 투약을 병행해야 했다. 알고 보니 전날 저녁에 먹은 파스타에 들어있었던 잣 성분이 극심한 알레르기 쇼크를 일으켜서 저혈압, 피부 트러블, 호흡 곤란 등을 불러온 것이다. 이게 벌써 5년이 넘었지만 와이프는 아직도 견과류를 입에 대지 않는다.


#2. 아들 태민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집 근처 베이커리에서 빵을 몇 개 사서 아이와 함께 먹었는데 그중 호두가 들어간 빵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말도 잘 못하던 애가 피부를 막 긁으면서 "배, 배 아파"라고 해서 배탈인가 싶어 약을 먹였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을 붙잡으며 밭은기침을 계속 해댔고,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 바로 아산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어지간한 알레르기 반응은 주사 한 대 맞으면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태민이는 주사를 맞고도 반응이 크게 줄어들지 않아 의사가 "수액을 한 시간 정도 맞으면서 기다리고 주사를 한대 더 맞자"라고 조언했다. 맙소사.


자폐 때문에 촉각이 민감한 태민이는 한 시간 내내 고래고래 울며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으려 했고, 필자와 아내는 이를 막기 위해 아이의 양 팔을 잡고 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아이의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꽥꽥대는 아이와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민망하던지. 다행히 주사를 한대 더 맞고 나서 증상이 많이 가라앉아서 자정 정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나마 와이프는 잣 이외에는 알레르기로 고생한 적이 없지만, 태민이의 경우 여러 음식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반응 수치도 굉장히 높다. 미국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실시했던 알레르기 검사에서는 대부분의 견과류 (호두, 땅콩, 아몬드...) 에서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수치가 나왔다. 그렇기에 에서는 물론이고 여행을 다닐 때도 언제나 한 무더기의 주사제와 알레르기 약을 싸 들고 다녀야 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살면서 가끔씩은 견과류에 노출이 될 수밖에 없으며, 아이가 온몸을 긁으며 기침을 할 때면 알레르기약을 먹여서 증상을 완화시키곤 했다. 다행히도 약이 안 통하면 써야 한다는 주사제는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는데,  과연 필요할 때 내 손으로 아들 허벅지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을 수 있을까? 


이렇다 보니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는 언제나 "아이가 알레르기가 있는데 혹시 견과류가 들어간 음식이 있나요?"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식당의 지배인이나 요리사가 직접 나와서 아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를 보이는지 꼼꼼히 적어간다. 어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가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어요"라고 했더니 아이스크림 주걱을 꼼꼼히 씻어낸 후 아이의 아이스크림을 뜨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에서였다면 아마도 '그런 거 안 들어가요' 하고 끝나지 않았을까? 물론 미국에서는 자칫하면 큰 규모의 소송을 당할 수 있기에 대응 매뉴얼이나 직원 교육이 잘 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알레르기에 대한 인식에서 한미 간 큰 차이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레스토랑뿐만이 아니다. 미국 학교에 알레르기가 있는 학생이 입학할 경우, 양호 교사는 부모에게 의사 처방을 받은 약 및 주사제를 가져오도록 하여 학교에서 긴급한 상황 발생 시 응급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태민이는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을 경우 알레르기가 있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별도의 테이블에서 식사한다.  소풍을 갈 때도 만약을 위해 담임교사 혹은 양호교사가 알레르기 약 혹은 주사를 들고 간다고 한다는데, 최소한 필자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한국의 어떤 학교도 이런 프로토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앨러지와 알레르기, 두 발음만큼이나 다른 미국과 한국 간의 태도. 미국이라고 한국보다 알레르기 환자가 많다거나 증상이 심각한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까지 인식과 대응이 다른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알레르기가 '유난'이 아닌 '생명'이 달린 문제이며, 두 명의 알레르기 보유자(?)와 함께 사는 필자에게는 미국의 방식이 아무래도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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