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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Jan 07. 2021

도깨비방망이, 그 치명적 유혹

세상에서 가장 비싼 야구 방망이가 뭘까~요?


‘도깨비방망이’하면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혹부리 영감’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뚝딱’ 하면 떡이 나오고 ‘뚝딱’ 하면 금은보화가 쏟아지고 ‘뚝딱’ 하니 심지어 턱에 붙어있던 흉물스러운 혹마저 뚝 떼어갔다던 바로 그것. 이야기를 들은 날 밤, 혹여 도깨비가 나타날까 무서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하면서도 '만약 나타난다면 그놈의 방망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봐 두리라' 다짐했었던 그 시절 도깨비방망이는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그 무엇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어느 여름날 밤, 시합을 마치고 팀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한잔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입에서 도깨비방망이 이야기가 나왔다. ‘뜬금없이 웬 도깨비 이야기인가? 벌써 취하셨나?’ 싶어 피식 웃으며 다른 동료들을 돌아보니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천하무적 야구단의 김성수가 그걸로 정식 야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하나에 몇백만 원씩 한다’, ‘치고 나서 절대 던져버리지 않고 흠집 날까 봐 품에 꼭 안고 뛴다더라’ 등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어안이 벙벙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그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면, 호기심에 인터넷 검색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통장 잔액은 물 댄 옥답처럼 찰랑찰랑했을 텐데.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이미 늦은 법



사회인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런 식으로 도깨비방망이-미국 Easton 社에서 90년대 후반에 생산한 Z2K 알루미늄 야구 배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기 마련이다. 해당 배트의 너무나 뛰어난 성능으로 인해 미 대학야구 투수·수비수들이 해당 시즌에 엄청나게 고생을 했고, 결국 미국 아마야구 협회에서 생산 업체들에 배트 반발력(배트가 공을 튕겨내는 강도) 규제를 부과하였다는 것은 업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Z2K 배트는 생산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배트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으며 새 제품은 100~200만 원, 낡은 중고품도 금만 가 있지 않으면 최소 40~50만 원은 받을 수 있는 초고가의 배트이기도 하다. (참고로 현재 시판되고 있는 최고 등급 새 배트의 가격이 기껏해야 30~40만 원 수준이다)

 

공을 때릴 때의 찰진 손맛, 타구의 긴 비거리, 가벼운 무게감 등 Z2K 배트로 몇 번만 공을 쳐본다면 왜 사람들이 이 물건을 그리 비싸게 주고 구입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구매 후 첫 경기에서 깨지는 사례가 보고될 정도의 약한 내구성과 엄청난 가격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훨씬 저렴한 다른 배트를 구매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중고장터에서는 Z2K 배트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미국의 사회학자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그의 대표 저서인 ‘유한계급론(1899)’에서 "상류층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라고 비판했는데, 여기서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뜻하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가 유래하였다. 예를 들어 핸드백·보석 등 사치품이나 고급 세단 등은 비쌀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경향을 종종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재력 과시 및 허영심 충족을 위해 구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튼튼하지 못한 탓에 지난 20년간 수많은 Z2K 배트가 파손되었으며 이에 따라 살아남은 소수의 배트 가격은 기존 사용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폭등하였다. 그러나 이 가격 상승을 Z2K 배트 자체의 뛰어난 효용이나 공급 감소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각종 제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성능은 비슷하면서 튼튼하기까지 한 다른 배트들이 계속 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야구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Z2K 배트가 -여성의 샤넬 혹은 에르메스 핸드백처럼- 일종의 ‘must have item’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수요가 증가하였다는, 즉 베블런 재(Veblen’s goods)화 되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다. 타자가 들고 있는 Z2K 배트가 ‘나는 이 정도 방망이를 쓸 정도로 실력도 있고 재력도 있다’는 과시의 상징이 되었달까? 타석에 들어서고 난 후 상대 팀 포수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며 배트 가격을 물어보고 부러워하거나, 수비수들을 뒤로 물려서 장타를 경계할 때의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한 발 더 나가서 Z2K 배트 수십 자루를 수집하여(어지간한 중형차 한 대 값이다) 야구 커뮤니티에 사진을 게시하면서 자랑하는 사람도 있으니 베블런이 만일 이 모습을 본다면 100년이 지나도 인간은 변한 게 없다며 씁쓸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명품 브랜드 제품을 탐하곤 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호갱님’이 되지 말자며 열변을 토하던 나였지만, 언제부턴가 창고 안에 있는 세 자루의 도깨비방망이를 생각하며 ‘앞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을 거듭하게 되어버렸다. 



어쨌든 이번 주말에도 나는 도깨비방망이를 들고 야구장으로 갈 것이다. 

당당하게, 하지만 쿨한 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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