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괴물
한동안 딱히 쓸만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청나게 바쁘기는 했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고 바쁜 일상이었다.
올 3월, 하나의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모르는 것도 많은 내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기대감보단 걱정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잘 마무리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느끼고 체감했다.
많이 부족했다. 어렸고, 무지했으며 가지고 있는 역량에 비해 과한 업무를 부여받은 느낌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발전하는 부분도 있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나가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혔다.
한 가지 나에 대해 크게 실망했던 부분은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같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동료의 자세를 보니 더욱 크게 느껴졌다.
본인은 성장하고 싶다며 맡은 일 외에 일도 자신이 하려 했고, 그 친구는 그렇게 더 배워나갔다.
나는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배우고 성장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1순위로 삼아왔던 나인데,
왜 이렇게까지 의욕도 열정도 식어버린 사람이 된 것일까.
어쩌면 그때 형이 말했던 평범한 삶에 적응이 되어 가는 걸까.
아니면 책임감이 없어지고 있는 걸까.
잘하진 못해도 책임감과 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책임감마저 없으면 난 무얼 내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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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뭐 고민이나 힘든 거 없어?"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본래 업무로 복귀하면서 궁금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다.
선배에게 이런저런 새로운 프로세스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가 됐을 때쯤 내게 물어왔다.
평소 같으면 "아뇨 괜찮습니다. 별일 없어요" 했을 나였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음.. 저는 제가 아직도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항상 잘하고 있다고 말씀해주시지만, 그게 와닿지가 않는 것 같아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것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가장 크게 고민이 됐고 혼란스러웠던 건 그래서 내가 잘하는 게 뭘까?라는 거예요.
어찌 됐든 경쟁을 해야 하고 저는 살아남아야 하는 거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져가야 할 무기는 뭘까,
뭘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고, 또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선배는 내 고민을 이해한다고 했다. 자신도 그렇고, 팀장님이나 실장님도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며
위로와 함께 격려를 해주었다. 감사함을 느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난 더 아래로만 내려갔다. 좀처럼 슬럼프를 회복하지 못했다.
기폭제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프로젝트였는데, 큰 실망과 함께 남아있던 열정마저 빼앗아갔다.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동기마저 떨어져 2~3개월 간 나사가 하나 빠진 채 출근을 했다.
그즈음 회사에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존 팀장님과 실장님은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셨으며, 선배가 팀장의 자리에 올라섰다.
새롭게 팀장이 된 선배는 본인이 팀을 이끌게 된 만큼 빠르게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고,
뉴 캡틴과 함께 업무 프로세스도 달라지며 과도기를 겪었다.
과도기인 만큼 모두가 정신이 없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실수가 나왔다.
그때마다 선배의 호출과 비난에 우리 팀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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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회의실로 좀 올래?"
선배의 호출이었다. 아침부터 한껏 헤어드라이기를 가동했던 터라 잔뜩 긴장하고 회의실로 향했다.
"네 부르셨어요?"
"혹시 나한테 얘기하지 못하는 너의 사정이 있니?, 현타가 왔다던가. 무슨 일이 있다던가"
"... 아뇨 없습니다.."
"음..... 혹시 OO아 네가 지금 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
"... 아뇨"
"지금 있잖아. 네가 제일 열심히 해야 되는 시기고, 포지션이야. 근데 보면 네가 제일 열심히 안 해.
솔직히 역량 차이? 네가 조금 더 낫긴 해 쟤네들 보다. 근데 크게 차이는 없어. 진짜 요만큼 밖에 차이가 안나."
"..."
"넌 아침마다 무슨 생각으로 출근해? 여기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어?? 무슨 역량을 키우고 싶니?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어??"
"...."
"하.... 진짜 진짜 열심히 해야 돼. 나 이사님이랑 얘기하고 왔어. 이번 10월 리스트업까지만 보고, 이 사람이 끌고 갈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면 나는 팀원 바꿔달라고 할 거야.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 가서 다른 팀을 가던지, 아니면 다른 회사를 가던지 선택해. 아니면 그 전에라도 말해줘도 돼."
최후통첩이었다. 경각심을 주고자 강하게 얘기하신 것이겠지만,
머리를 쾅 맞은 느낌에 한동안 회의실에서 나가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계속해서 고민해오던 것에 확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 여기까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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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이후, 회사에서는 우리 팀의 역할을 줄여가는 분위기를 풍겼다.
온전히 우리 팀이 의사결정을 가지고 있던 프로세스에서
하나 둘 컨펌을 받아야 하는 구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브랜드팀과 상의를 해야 하는 부분도 생겨났다.
결정적으로, 기획단을 다른 팀에 빼앗기게 됐다.
이 부분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입사 초기부터 느꼈던 것이 있다. 이 일은 나랑 정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남아서 맡고 있었던 것은 동기부여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항상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기획을 하면서 배울 수 있는 부분, 성취가 바로바로 보이는 것 때문에 연봉협상에도 유리한 고지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굉장히 컸다.
헌데 어느 새부터 하나 둘 개입하는 팀이 생겨나고, 성과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동기부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기획단까지 빼앗기게 되면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퇴사를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