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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leap Sep 04. 2015

섬의 맛.

누군가에게 나도 어떤 '맛'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초등학생 때 꾼 꿈이 하나 있다. 거의 자려고 눕자마자 꾼 꿈이었는데, 내 얼굴 주위에 수은처럼 은빛이 나는 젤리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입 안으로 쏙 들어오면서 꿀꺽 삼킨 꿈이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 그 젤리에는 '12'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는데 그걸 꿀꺽 삼키자마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로 잠에서 깼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에게 가장 강렬하게, 또 무의식적으로 남는 자극은 미각인 것 같다. 냄새나 소리, 보이는 것은 자극이 오는 순간 먼저 약간이라도 자극을 받아들이고 나서 판단을 하게 되지만 맛의 경우 혀에 닿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반응이 오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번 맛본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같은 맛의 무언가를 만났을 때 머리가 기억해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체하고 나면 보기 싫어지는 음식이 생기는 것, 어떤 것이 혀에 닿자마자 속이 메슥거린다거나 저도 모르게 음~ 하는 소리를 낸다거나하는 것을 보면 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제목에 들어간 사진은 우치다 요코가 쓴 책 '밀라노의 태양 시칠리아의 달'의 한 페이지다. '섬의 맛' 이라.

나에게 있어 '맛'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이 '12 젤리'를 먹은 꿈인데, 속을 메슥거리게 했던, 어쩌면 꿈이라 명확한 기억이 남지 않아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뭐라고 표현이 불가능한 그 맛은 절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 삶에서 실제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지만 계단을 오를 때도 열 두걸음에 오르면 왠지 불길하다고 느꼈고, 시계를 봤는데 우연히 12시 12분이기라도 하면 기분을 버렸으며, 버스 자리를 예매할 때도 12번 좌석은 절대 선택하지 않았고 차례같은 걸 정할 때 열 두번째는 절대로 피해야 할 순서였으니까.


지금은 되는대로 지낸다고, 어쩌다 '12'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길가다 눈이 마주친 전남친을 보듯 무심하게 지나간다고 해도 속에서 미친듯이 솟구치는 아드레날린까진 어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떤 '맛'으로 남는 것 만큼 강렬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그 맛이 좋은 맛이든 나쁜 맛이든 그 사람의 머리가, 이성이 반응하기 전에 몸이 먼저 대답을 하게 만드는 것.


절대 잊혀지지 않을 그런 '맛의 기억'으로 남는다면, 난 어떤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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