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잠깐 왔다가 떠나버리는 사람 쯤으로 여겨줬으면"
2년의 호주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2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 (줄여서 외노자) 신분으로 힘들었다는 명목으로, 집에서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다.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백수생활, 나는 내가 많이 바뀐 줄 알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 중의 대부분의 순간들을 보낸다. 이러한 감정은 꼭 엄마와 있을 때야 못난 모습으로 드러나고 만다. 서른 살이 되어 호주에서 다니던 학교도 중간에 그만 두고 아무런 대책 없이 한국에 돌아온 딸이 반가울 리 없다. 서른이나 되었는데 하고자 했던 것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 역시도 내가 자랑스럽지 않다. 그래도 나는 많이 힘들었지, 조금은 쉬어도 괜찮아. 인생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아. 와닿지 않을 위로라도 그리웠다. 아빠는 “저 딴에는 뭐라도 해보겠다고 혼자 가방 싸들고 가서 고생만 실컷 하고 돌아왔는데 용기가 가상하다. 그렇게 하라 해도 못하겠다. 솔아, 니 하고싶은 것 하고 살아라. 주변에 물들고 휩쓸리지 말고 니 하고싶은 대로 해라. 그러면 된다”낮에 아빠와 함께 돼지갈비를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 때문일까 원망도 많이 하고 밉기도 한 아빠지만 엄마의 한심한 눈빛 앞에서는 어쩐지 아빠가 고맙다. “아빠는 그렇게 말 안하더라, 엄마처럼 그렇게 독하게 말 안한다고, 고생 했다고 많이 힘들었겠다고 하더라”“그러면 아빠 집에 가지 왜 내 집에 왔는데?”이혼가정 자식마음에 상처주는 말 1위를 시작으로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동안 많이 누르고 참았던 감정 유독 엄마에게만 분출되어 고요한 새벽 시간 서로에게 소리를 치고 울며 상처를 준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건 내가 호주에 가기로 결정한 3년 전의 일이다. 심지어 나는 엄마를 픽업해 법원에 데려다주고 법원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며 기다렸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날 법원에 데려다주는 딸이라니, 기분이 너무 이상하고 복잡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함께 지내며 상처를 주는 것 보다 나으니까. 오히려 나는 부모님의 이혼을 독려하기 까지 했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에 나는 아빠를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아빠를 만나러 갔더니 치과에서 윗 니를 다 뽑아 피 범벅인 거즈를 물고 혼자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계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가 다 빠져 양 볼이 쏙 패인 아빠의 얼굴이, 그 장면이 생각나서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아빠를 원망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주기적이었던 주취 후 폭력이 가장 최초의 기억인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되어 스물 여섯 살 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빠를 미워해야 하는데 망가져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고, 아빠를 원망해야 하는데 혼자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이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떠나야만 했다. 내가 이 지역, 아니 이 나라에 있는 한 내가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어렵겠단 판단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싶었다.
당시에 이렇다 할 커리어를 쌓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역병이 한창인 탓에 나름대로 하고 있던 무역사업도 잘 굴러가지는 못했다. 3년을 만난 남자친구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서른이 되면 호주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갈 수 없게 되니 스물 여덟에 가서 서른에 돌아오자.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잠시 도망쳤다가 돌아오면 아빠는 아빠대로 잘 살고 있을 거고, 엄마도 엄마대로 잘 살고 있겠지. 그렇게 서른이 되어 돌아온 지금의 나는 2년 전처럼 아빠의 수척한 얼굴을 보고 울지 않을 만큼은 성장했지만, 그들의 헤어짐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된 만큼 성숙해지지는 못했다.
“솔이가 캐나다로 떠나버린 줄 알았네”
집에서 노느라 바쁘지만 잠시 외출을 할 경우에는 엄마의 귀가시간인 7시 50분에 맞춰 칼같이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리고 운동을 간다. 일종의 루틴인 것이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나도 외출하여 커피를 마시고 친구와 수다를 떨다 별 생각 없이 늦게 들어왔다. 엄마의 표정이 어둡다. 초록병도 하나 보인다.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해도 대꾸도 없다. 먹었으면 이제 운동하러 가자고 초록병과 음식물 쓰레기를 가지고 현관문을 나선다. 걷기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엄마가 솥뚜껑 삼겹살 집에서 소주 한 잔을 더 하고싶대서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해야하지만 가끔은 이런 일탈도 추억이 되는거니까,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지만 삼겹살 집에 들어간다. 한 입 크기로 잘라져 나온 삼겹살은 먹기 좋게 초벌 되어 나왔다. 사장님께서 한 점 한 점 맛있게 구워주기 까지.엄마의 소주병을 비우고, 솥뚜껑 위의 삼겹살도 깔끔하게 비워냈다. 쌈을 야무지게도 싸서 먹었다. 계산을 하고 엄마와 집 앞에 공원으로 향한다. 2년 동안 와보지 못한 우리 동네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무인 옷가게, 심지어 무인 문구점까지 생겼다. 호주에서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창업 아이템이다.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맨발 산책을 다섯 바퀴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디 로션을 대충 바르는 도중에 얼큰하게 취한 엄마가 뜻밖의 얘길 꺼낸다. “솔이가 캐나다로 떠나버린 줄 알았네”
한국에는 돌아왔지만 한국에서는 살고 싶지 않고 그렇다 할 대책도 없는 불안함 때문에 나는 입버릇 처럼 곧 캐나다에 간다고 말해왔다. 그 말에는 내가 여기에 쭉 있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나는 항상 잠깐 왔다가 떠나버리는 사람 쯤으로 여겨줬으면 한다. 곁에 있기 바라지 말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싶지 않다.
“이 방에도 없고, 저 방에도 없고 자고 있나 해서 엄마방에 가도 없고, 컴퓨터랑 자판은 책상에 있는데 하얀 가방은 또 어디 가고 없고 가방에다가 짐을 챙겨서 캐나다로 가버린 줄 알았네.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줘서 그냥 가버린 줄 알았네.”
“엄마, 캐나다가 무슨 옆 동네야? 그리고 엄마한테 말도 없이 캐나다를 간다는 게 말이 돼?”
“몰라. 2년 동안에 혼자 이 적막함을 잘 적응했는데, 또 솔이가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집에 왔는데 없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고 우울하고 그랬어”
며칠 전에 엄마와 울고 불며 다투었던 그 날에도 내가 처음에 떠나고 나니 너무나도 허전해서 강변을 걷고 또 걷고 피곤해서 잠이 쏟아질 때 까지 걸어야만 했단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져서 뜬 눈으로 멍하니 창문 밖을 보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나는 늘 떠나는 사람의 입장이었다. 학창 시절엔 다섯 가족이 복작복작 살아온 탓에 하나가 빠지면 오히려 분주하지 않아 좋을 지경이었다. 늘 언니와 함께 방을 써야했던 나로서는 언니가 기숙사에 살면 내 공간이 생겨 좋았고, 언니가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면 인터넷과 프린터를 고쳐줄 사람은 없었지만 밤 늦도록 휴대폰을 해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언니가 돌아온 해에 내가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중국에 갔다. 혼자 해외에 동떨어져 있으니 아빠의 술주정을 받아 줄 필요도 없었다. 도 넘게 엄마의 흉을 봐도 싫다는 소리 없이 그 순간만 넘기기 위해 엄마를 배반하지 않아도 되었다. 취한 아빠가 잠에 들 때까지 동네를 배회하는 엄마를 따라 걷지 않아도 되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에 겁에 질린 엄마를 안심시키지 않아도 되었고, 밤 늦게 다급하게 걸려오는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나 대로 살면 되었고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마음껏 회피할 수 있었다. 싫으면 떠나면 되고 아프면 떠나면 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나는 중국어도 곧 잘 하고, 영어도 잘 하기 때문에 어느 국가를 가도 일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비자만 있다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이 것 만이 내가 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상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버틸 수 있는 희망인 것이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내가 없어도 엄마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때 되면 또 오겠지 담담하게 저녁을 차리고 소주 한 병 기분 좋게 비워냈으면 한다. 하고싶은 것 다 하라고 큰 소리 치더니, 막걸리 세 병에 취해 캐나다에 가지 않으면 안되겠냐고 아빠는 솔이가 이 동네에 있어서 참 좋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가간 막내 동생이 아빠를 보살피지 않는다고, 서울에 있는 언니가 바빠 자주 전화할 수 없다고, 솔이와 언제든지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아빠가 요즘에 참 좋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
인생은 힘들고 세상은 잔인하다.
인생은 힘들고 세상은 잔인하다
내 권력과 내 능력과 내 생명력이 없다면
언제 어디서나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강해질수밖에없다
그러지않으면 활짝핀인생을 꿈꿀여유조차 없이
혼자서 좌절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을테니까
2009년에 엄마가 내 블로그에 남긴 방명록이다. 중2병을 심하게 앓던 나는 서른이 되어서도 골칫덩이다.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 모은 돈이 없으며 출국과 동시에 외국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아마 어느 것 하나도 엄마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이 지긋지긋하고 싫어서가 아니라 한국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럴 가능성도 희박해보인다. 가족은 내가 가까이에 있지 않아도 각자의 몫을 하며 그저 살아간다. 내가 멀리 있어 가족을 그리워할 때가 가장 좋은 감정이었다. 나는 이제 나만의 세상과 세계를 만들 차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