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는 법, 다시 기본부터
선양그룹에서의 ‘사죄 미팅’ 이후, 김대리의 삶은 폭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고요해졌다.
그를 향한 영웅 숭배도, 스파이라는 의심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조용하고 묵직한 ‘인정’이 내려앉았다. 특히 강대리는 이제 그에게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김대리는 ‘빚을 갚는 삶’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채권자는 바로 그가 속한 영업2팀이었다.
#사내정치 #협업의기술 #리더십
진정한 사내 인맥은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증명하여 동료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뛰어난 개인 플레이어는 박수를 받지만, 동료를 돕는 플레이어는 존경을 받는다.
입사 2년 차인 이주임이 까다로운 클라이언트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다.
제안서를 몇 번이나 넣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고 있었다.
예전의 김대리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이주임, 제안서 나한테 한번 보여줄래요?”
김대리는 이주임의 제안서를 검토하며, 자신이 박팀장과 선양그룹 PT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건 우리 제품의 스펙이 아니에요. 그 스펙으로 자기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가 궁금한 거지. 이 부분을 ‘문제-해결-기대효과’ 순으로 바꿔서 다시 써봐요. 내가 지난번 썼던 템플릿 줄게요.”
그는 자신의 성공 방정식을 아낌없이 동료와 나누었다. 그의 도움으로 이주임은 마침내 그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와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팀원들이 그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혼자 빛나는 ‘괴물’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에이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 빚을 갚을 차례는, 오한나였다.
그는 며칠을 고민했다. 선양그룹 사건 이후, 그는 오한나 앞에 더욱 떳떳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경멸하던 ‘계산적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숨는 것은 빚을 외면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연락했다. 화려한 레스토랑이 아닌, 한강 공원 벤치를 약속 장소로 잡았다.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어색하게 앉아 있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나야.”
“응.”
“지난번에 네가 해준 말, 계속 생각했어. 계산 깔고 대하는 사람들이 버겁다는 말.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아니, 그런 사람이었어.”
그는 선양그룹 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성공하고 싶어서,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서두르다 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순간이 있었어. 최근에 그걸 바로잡을 일이 있었고, 크게 깨달았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널 다시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미안하다.”
솔직한 고백이었다. 인맥이나 스펙이 아닌,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오한나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녀의 ‘마음의 벽’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성공이 아니라, 그의 실패와 반성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민석아.”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다들 그렇게 부딪히고 깨지면서 배우는 거지. 나도 그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냈다.
화려해 보이는 대기업 팀장의 삶 이면에 숨겨진 고충과 외로움에 대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인맥이나 조건도 없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한참을 걸은 후, 헤어지는 길. 오한나가 그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 연락할 땐, ‘괜찮은 사람’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김민석’으로 연락해.”
그 한마디가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듯한 위로가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빚을 갚는 길은 여전히 멀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 길을 혼자 걷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든든한 상사와 동료들, 그리고 그의 서툰 진심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화려한 인맥보다도 값진, 진짜 ‘관계’의 시작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